눈보라, 그리고 지붕
@조마(myname_rumi)
※이 글 드라마 <마이네임>의 실제 내용과는 무관함을 알려드립니다. 극 중 등장인물인 정태주와 윤지우의 일부 설정만을 따릅니다.
※청소년 흡연, 학교폭력, 따돌림 등의 부정적인 요소가 있는 글입니다. 모방의 위험이 있지만 글의 전반적인 내용을 위한 점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대한민국 사람들은 소문에 약했다. 그곳이 빛이 나는 무대든, 시골 촌구석이든, 많은 사람에게 스폿라이트를 받는 사람이라면 그 소문이라는 것을 주의했어야 했다. 소문은 무서웠다. 한평생 쌓아놓은 자신의 업적을 형체도 없는 것이 발로 걷어차 무너뜨리는 것이 소문이었다.
"야, 너 그거 들었어?"
"어떤 거?"
"윤지우 말이야. 그 전교 1등. 아빠가 조폭이래."
자리에 엎드려 이른 아침부터 가만히 학생들이 떠드는 소리를 듣던 정태주는 그 사실을 요즘 더 확실히 느꼈다. 학생들의 입에 항상 오르내리는 그 이름, 윤지우. 자발적 아웃사이더를 자처한 정태주는 같은 반에 있으면서도 여태까지 자신은 한 번도 말을 걸어본 적이 없는 그 아이의 이름을 2학기가 끝나가는 최근 한 달 동안 귀에 피가 나도록 들은 것 같다.
창 밖에 날리는 눈보라처럼 학교 안에도 눈보라가 날리지 않을 틈은 없었다.
들렸던 이야기들을 종합해보면, 윤지우는 아명고등학교에서 1학년 때부터 전체 성적 1등을 놓친 적이 없었다. 학원도 하나 안 다니고 뉴스에서나 볼 법한 서사를 가졌다며 한 번은 교장이 윤지우가 모의고사에서 전국 백분위가 상위 0.1% 안에 든다며 장학금을 주는 자리를 전 학년 교실에 생방송으로 보여준 적이 있었다.
그런 윤지우가 조폭의 딸이라. 학교 안에도 언론사가 존재했다면 이보다 더 자극적인 기사의 소재는 없었을 것이라고 예측했을 것이다. 교장부터 1학년 학생들까지, 윤지우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혼자 남은 가족인 아버지마저도 얼굴을 잘 볼 수 없다는 윤지우의 이야기는 이미 유명한 일화가 되어있었다. 사교육도 잘 받지 않고 수업이 끝날 때마다 교탁 앞으로 나가 선생님께 이것저것 물어보는 윤지우의 이야기 또한 귀가 닳을 때까지 들었다.
그리고 무한한 가십의 굴레 속에서 윤지우를 따스히 감싸주는 사람은 없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윤지우 옆엔 사람이 없었다. 친하다 싶을 친구는 물론, 조별과제를 할 때만 잠시 입을 열고 말하는 윤지우는 자유롭게 상의하는 시간이 끝나기 무섭게 EBS 문제집을 꺼냈다. 윤지우는 혼자 있는 것을 자처하는 것 같았다. 자신에게 불어올 눈보라를 오롯이 받아들이면서 말이다. 그것이 윤지우가 이 학교에서 살아남는 방법이었다.
윤지우가 교실 안으로 들어오자 곳곳에서 윤지우 이야기를 하던 학생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시끌벅적했던 교실은 침묵으로 가득했다. 고요의 여백은 윤지우가 자리에 앉아 가방을 제 책상 옆에 걸어놓을 때 학생들 한 명 한 명의 목소리가 채웠다. 한 순간도 빠지지 않는 오디오는 조례 시간이 되어서 담임 선생님이 들어와서야 다시 사그라들었다.
윤지우는 조용함 속에서도, 수다 속에서도 항상 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것이 왼쪽 분단 맨 뒤에 앉은 정태주가 제 오른쪽 분단의 앞자리에 앉은 윤지우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첫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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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는 간혹 오지랖을 부리길 좋아하는 학생들이 간간히 있었다. 쉬는 시간에 틴트 같은 것들을 바르다가도 자신과는 별 친분이 없는 아이들에게 말을 걸고는 선생에 대한 이야기나 소문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봉지과자를 까먹는 학생들 말이다. 그 오지랖은 윤지우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가끔 지우야, 하고 부르며 수학 선생이 낸 숙제를 도와달라는 말과 함께 윤지우에게 설명을 해달라고 다가오는 아이들은 결국 윤지우가 모든 문제의 정답을 알려줄 수 있도록 부추겼다. 그러고는 윤지우에게 고맙다는 의미라며 제 주머니에서 곰돌이 젤리를 꺼내서 놓고는 웃으며 손가락 하트를 날리고 가는 아이들이었다.
담임 선생의 조례가 끝나고 자리에서 기지개를 펴던 정태주는 윤지우의 앞에 그 아이들 중 몇몇이 서있는 것을 보았다. 겉보기엔 삼엄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어떤 아이들은 오늘따라 눈이 세게 날린다면서 추울 것 같다는 윤지우의 손에 흔들어 쓰는 일회용 핫팩을 쥐어주기까지 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윤지우는 가만히 그 아이들을 쳐다보기만 했다.
하지만 한쪽만이 유독 열심인 대화의 내용은 윤지우에게 가혹하기 그지없었다.
"지우야, 너도 그 소문 들었어? 너네 아버지가 무서운 일 하고 다니시는 거 아니냐던데."
"그러게, 지우가 공부하는 거 보면 사실은 아닐 것 같은데. 그렇지, 지우야?"
"설마, 그게 진짜겠어? 너희는 공부하기도 벅찬 지우한테까지 그런 이야기를 해."
친한 척 성을 떼고 부르는 것은 형식에 불과했다. 눈치 없는 사람이 보아도 윤지우를 비꼬는 말투인 것은 틀림이 없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정태주의 미간이 조금 찌푸려졌다.
"... 그런 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역시, 그런 거지? 그래, 지우 아버지가 진짜 조폭이겠어?"
"... 그리고 나 문제 풀 게 있어서 그런데, 지금은 좀 가줄래? 시험 기간이라 공부할 게 좀 많네."
그렇게 또 한 번의 소란이 잠들었다. 힘을 내라며 윤지우에게서 멀어지는 아이들을 뒤로 한 채 의연한 것처럼 문제집을 꺼내는 윤지우가, 한 손으로 주먹을 꼭 쥐는 것을 본 것은 이 반 안에서 정태주 한 명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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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뒤 교실 안은 시끄러웠다. 아버지가 경찰이라는 한 학생이 윤지우의 아버지가 조폭이 맞다면서 지금 경찰에서 그 조폭을 잡으려고 난리라는 말을 퍼뜨렸다. 얼마 전 윤지우의 해명이 무색하게도, 소식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갔다. 정태주는 그 소식을 들으면서도, 다른 아이들같이 윤지우에게 거부감을 느끼진 않았다.
그저 홀로 어두운 곳에서 이 거센 눈보라를 맞고 있는 윤지우에게 연민의 감정을 느낄 뿐이었다.
그 다음 날 여느 때처럼 자리에 엎드리려던 정태주는 항상 깔끔했던 윤지우의 자리가 무언가로 어질러져 있는 것을 보았다. 아직 윤지우는 등교하지 않은 것 같았다. 누군가 붉은 색 네임펜으로 윤지우의 자리에 크게 '조폭 딸이 부끄럽지도 않냐'는 글씨를 써놓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윤지우가 수업 시간마다 필기해놓은 글씨로 가득한 책들이 이리저리 찢겨있었다.
등교한 윤지우는 그것을 보고도 동요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언젠가 있을 일이었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아주 의연한 듯이 보였다.
며칠 전만 해도 윤지우에게 핫팩을 쥐어주던 아이들은 윤지우가 덤덤하게 찢긴 책의 페이지를 주워서 순서를 맞추는 것을 보고는 대놓고 코웃음을 치며 자리를 떠났다.
정태주는 가끔 점심 시간에 학교 뒤뜰에서 담배를 태우곤 했다. 학생들은 뛰어놀거나 친구들과 이야기하기 바쁘고, 경비를 보시는 선생님들도 학생 주임도 잘 오지 않는 곳이라 혼자 다니는 정태주가 담배를 피며 이런저런 생각에 빠지기 좋은 곳이었다.
그날도 점심을 간단히 먹고 나와서는 담배 한 개비만 피우고 돌아가려던 참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윤지우였다. 조심히 윤지우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다 거리가 조금 있는 곳에서 담배를 하나 더 꺼내들고는 윤지우를 바라보았다.
언제 또 윤지우의 자리에 무슨 짓을 했던 건지, 윤지우가 들고 다니던 플라스틱 필통 안에 끈적한 것이 붙어 떨어지지 않는 듯 했다. 윤지우는 뒷뜰에 있는 수돗가 싱크대에서 곳곳에 묻은 끈적이는 것들을 떼어내고 있었다.
손짓이 멈추고는, 필통을 내려놓은 윤지우가 고개를 떨구었다. 일주일 전 정태주가 봤던 윤지우의 꽉 쥐인 주먹과 비슷하게, 이번에는 싱크대에 제 두 손을 받치고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소리를 열심히 삼키는 것 같았지만 흐느끼는 소리가 미세하게 들렸다.
항상 어른스러운 척, 애써 덤덤한 척을 해왔지만 너무나 많은 상처를 입은 아이였다. 하지만 지금의 윤지우는 다른 학생들 앞에선 보이지 않았던 잔뜩 무너져내린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날씨가 추워 붉어진 손으로 싱크대를 치던 윤지우는 눈물을 닦고는 다시 필통 안에 있는 필기구들을 꺼내 필통을 물로 헹구기 시작했다.
어느새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 수업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때였다.
정태주는 잠깐의 생각 끝에, 윤지우에게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기 시작했다.
"... 필통 좀 줘봐."
"...?"
차가운 물만 나와 어느새 완전히 붉어진 윤지우의 손에서 필통을 가져갔다. 팔을 걷고는 이물질들을 하나씩 떼어내고 물에 흘려보냈다.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윤지우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정태주는 필통 속 물기를 털어내 윤지우 앞에 놓았다.
"... 다른 필기구들은 내 사물함 안에 있는 물티슈로 닦으면 될 거야. 그리고.."
"......."
"다 울었으면 가라."
"......."
"곧 수업 시작해. 너 공부 열심히 하잖아."
정태주는 그 순간, 혼자 눈보라를 맞는 윤지우의 앞을 가려줄 수는 없어도, 윤지우가 잠시라도 눈보라를 맞지 않을 수 있는 지붕이 되어주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