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험쥐
@여(rhdwn_life)
책이 녹아 나비가 팔랑이고 고양이가 숨죽이는 새벽. 동이 트려면 그때겠지. 언제까지 숨길 거냐, 태주야. 너는 연기에는 능하지 않은 것을.
- 지우가 조직에 들어온 것은 어린 날 저질렀던 죄악에 대한 회개와 관용을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건 죄악이 아니었습니다. 하늘과 맞닿아 목소리조차 닿지 않는 사람. 그런 최무진이 고작 고삐리 납치 사건 하나에 몸을 움직였다. 막내를 벗어나 시도 때도 없이 기어오르는 도강재보다 막내로 들어와 숨죽이고 힘을 키우는 지우가 더욱 못마땅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태주는 입 닥치고 살았다. 도살장과 같은 이곳에서 도끼를 들었지만 언제 발등 찍힐지 모르는 것이 리베르였다. 지우가 도강재를 누르고 체육관을 휘어잡았을 때도, 누구처럼 언더커버가 되었을 때도, 태주는 닥쳤다. 더 이상 닥치지 못할 순간이 닥쳐올 때까지.
정동길이 죽었습니다. 태주는 그날 혓바늘이 났다. 태어날 때부터 초우량아였다는 우락부락한 행동파였다. 동길은 온종일 하얀 공기 속에 파묻혀 정신이 해이해진 직원들의 기강을 잡는 역할을 했다. 마약 공장에 따라간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고, 다만 마지막이었다. 오래도록 살아남아 조직의 대문 역할을 하길 바랐던 인재가, 이 센티미터도 채 되지 않는 작은 쇳덩이 하나에 심장 뚫려 뒈진 것은 그리 유감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근본적인 것은 동길이 쳐들어온 경찰들에게 칼을 겨누었고, 그 쇠붙이가 자그마한 생채기 하나 내지 못하고 나동그라졌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동길의 앞에 세 명의 조직원과 여럿의 경찰들이 있었다는 것 역시. 태주는 혀밑에 묻혀 꺼내지 못하던 이야기를 시작했다. 몇 번이고 배신당했지만 여전히 심장의 팔십구 퍼센트 정도는 신뢰로 이루어진 최무진의 앞에서. 조직 안에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정동길은 평소에도 사건을 자주 일으키는 편이었고요. 태주야, 경찰 중에 범인이 있을 가능성은 얼마라고 생각하냐?
지우를 생각하시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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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오늘도 못 들어갈 것 같아요.
오늘 정동길이 사망했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내일은 들어갈게요.
마수대 쪽에서는 절 완전 막내 취급해서, 이번 일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습니다.
다만 전원 모두 탄환 소비 없이 복귀했습니다.
썩은 나무는 추앙받는다. 건강한 나무보다 썩은 것을 더 좋아하는 괴상한 취향의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 선택받지 못하면 나무는 그대로 썰린다. 바스라질대로 바스러져 무게 한 점 가중시키지 못하고 사람들의 어깨에 무력하게 얹혀 그대로 밭의 거름이 된다. 도강재가 그랬다. 속이 다 문드러져 최무진 눈에 든 정동길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못하는 종류였다. 안타깝게도 동천에는 특이 취향이 없었으므로, 강재는 눈 뜨고 코 베인 꼴이 되는 것이다.
정동길과 도강재는 동천파의 트러블메이커나 다름없었다. 온종일 돼지새끼니 좆만이니 상스러운 이야기를 하면서 입만 놀린다면 그나마 운이 좋은 날이었다. 누구 하나라도 먼저 주먹이 나가는 날에는 위아래 할 것 없이 층간소음이 생겼다. 정동길이 점잖은 편에 속하지는 않았으나, 강재가 그보다 훨씬 미친고양이새끼였기 때문에 항상 문제의 원인으로 꼽히는 것은 도강재. 태주는 너무 빨리 자란 나머지 손쉽게 문드러지는 나무를 감히 연민할 인간은 아니었으나, 동천파에 들어온 인간들은 각기 본래와 다른 이름을 가지고 살아가기 마련이다. 태주는 항상 도강재의 편을 들었다. 어쩌면 사죄에 가까운 마음으로. 이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기고만장해진 강재가 정동길에게 쉼 없이 주먹을 날려도, 태주는 닥쳤다. 이 바닥 더러운 것은 원투데이가 아니었으며, 태주는 죽이지만 않으면 조직원끼리 살점을 물어뜯든 주먹질을 하든 알 바 아니었다.
그러나 이건 태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까 도강재는 태주를 잘 알지 못함이 분명했다. 기실 태주는 그애가 동길을 죽기 직전까지 패더라도 눈 감고 넘어갈 위인이었다. 그러나 강재는 처음으로 따라간 공장에서 정동길이 직원들을 능숙하게 다루는 것을 보고 눈이 돌아가지 않을 만한 위인이 아니었다. 그애는 정동길보다 네댓 걸음을 앞서있었고, 칼보다는 총을 좋아했다. 정동길이 당한 직후, 도강재는 가장자리 계단에서 뛰어내려왔으며 딱히 동길을 걱정하는 기색도 아니었다. 어쩌면 조소를 흘리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그래서 태주는 동길이 죽은 다음 날, 그러니까 고작 하루 만에 도강재라는 범인을 색출했다. 네가 조직을 배신했어. 적어도 심장은 피했어야 했다. … 조직은 배신자를 내버려 두지 않는다, 강재야.
정태주는 최무진이 어떤 선택지를 제공할지 예상하지 못했다. 삶과 죽음인가, 팔과 다리인가. 홧김에 동료를 죽인 것은 엄밀히 따지자면 배신은 아니었으나, 도강재는 무려 지우에게까지 미친고양이새끼처럼 군 적이 적지 않았다. 최무진이 그애를 내버려 둘 리 없다. 조직을 사랑하는 태주는 미친고양이새끼처럼 구는 강재를 보고 눈이 돌아가지 않을 만한 위인이었는가. 그날 마음이 동했던 것은 최무진의 명령이었는가.
그러나 정태주는 결코 정동길을 아낀 적이 없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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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주의 침실에서는 항상 금속 냄새가 났다. 조직원들이 아부 떤답시고 선물한 몇십만 원 어치의 향수, 매일 관리하는 침구의 인공적인 향기, 최무진에게서 받아온 캐모마일 잎, 그 모든 것들이 뒤엉켜 한 자루의 총에게 집어삼켜졌다. 갓 날아오른 탄환과 총구에서는 화약 냄새가 난다. 지독하고 낯익은 향기, 태주는 그 향을 좋아하지 않았다. 총보다 칼을 즐긴 것은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십일 세기에 살고 있는 태주는 하루에도 몇 번씩 코에 탄환이 날아들어오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그건 꽤나 불유쾌한 일이었으나, 제트 세대 경찰들은 권총을 양손에 다발로 들고 왔으므로, 태주인들 어쩌겠는가.
태주의 둥그런 코가 화약을 잊을 리 없다. 태주는 하루만에 동천으로 돌아온 지우의 손끝에 희미하게 스민 향기를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조직을 너무나 사랑했고, 강재는 이미 최무진의 방으로 들어갔으니까. 그래서 태주는, 얼굴도 제대로 맞댄 적 없는 여자애를 데리고 끝없이 추궁했다. 병아리 시절부터 해온 숱한 싸움질로 부분부분 굳은살이 배긴 지우의 손을 단단히 붙든 채. 지우의 얼굴에는 오롯이 태주에게만 드러내는 감정의 흔적이 서려있었다. 태주가 정태주의 이름으로 살아갈 때 위아래도 없이 훑어보던 눈빛. 태주는 대꾸조차 없는 지우의 투박한 손끝에 얼굴을 들이밀고 도로 떼기를 수 번 반복했다. 분명한 화약 냄새였고, 태주 역시 항상 하던 눈빛을 하기로 했다. 그러니까 태주 역시, 오롯이 지우에게만 보여주는 눈빛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약속된 정적이 흐르고, 지우가 태주에게서 벗어났다. 현장에 나갈 준비를 했습니다. 절 의심한다고 해서 배신자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정태주 이사님.
기필코 화약 냄새는 사라질 것이다. 지우가 샤워실로 들어가버렸으니 말이다. 지우의 손끝에 미세하게 남아있던 탄환의 흔적을 이제 더 이상은 느낄 수 없다. 오직 태주만이 그 진리를 파악할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최무진의 방에 들어가 버린 강재를 꺼내올 기회는 지금뿐이었다. 완강히 부인하던 도강재의 표정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정동길이 미웠지만 딱 죽이지 않을 만큼만 미웠다던 그애의 증언도. 하지만 그럼에도 도강재가 죽였다. 진실은 세상에 단 하나뿐이었고 태주는 스스로 아둔해지기를 택했다. 평생을 유능한 동천파의 이 인자로 살아왔던 태주에게 새 이름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현장에서 발견된 총은 없다고 합니다."
"경찰에서 가져갔겠지. 조진세한테 연락해라, 태주야."
강재에게는 며칠의 유예가 남아있었다. 단단하게 밀봉된 봉투 안에 동천의 총이 들어있느냐, 별 볼 일 없는 단추가 들어있느냐가 그애의 목숨을 흔들었다. 태주의 알량한 말 한마디에 도강재는 뿌리가 뽑히고, 단두대에 목을 들이밀었다. 태주의 수많은 이름들 중 동천을 배반하는 이름은 없었다. 모든 건 조직을 위해서. 태주의 DNA에는 다른 이들과는 다른 새로운 이름을 붙여야 할지도 모르겠다.
… 제가 직접 가겠습니다. 조진세를 치울 때도 됐다, 최무진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충실한 개새끼인 태주는 비린내 나는 방파제가 가득한 바닷가로 달렸다. 조진세를 처리하는 데에는 태주도 찬성이었다. 진실을 너무 많은 사람이 알고 있으면 언젠가 탈이 나기 마련이다. 죽을 운명인지도 모르고 털레털레 걸어 나오는 모습이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비실비실한 약쟁이새끼나 다름없는 몰골을 한 진세는 오자마자 약 이야기를 하기 바빴다. 그나저나 언제쯤 소식을 주시려나, 응? 나름 쏙쏙 빼먹지 않았냐. 경찰들이 기승을 부려서 말입니다. 오래간 굶은 약쟁이는 그 허기만큼이나 쓸모없는 말을 속속들이 토해냈다. 태주는 몇 번이고 한숨을 쉬고 입술을 짓씹었으나, 인내하고 또 인내하여 비로소 최무진의 의문에 답을 줄 수 있었다. 발견된 증거야 뭐 탄환, 단추 이런 것들이지, 총은 없었지 뭐냐? 이거이거 내가 보니까 우리 쪽 소행이네.
"마수대에 특별한 일은 없었습니까?"
"짭새들 지껄이는 소리 다 똑같지 않겠냐. 아, 근데 이번에 옛날옛적 마수대에서 근무하던 놈 총이 돌아왔다더라? 참, 희한한 일이 다 있다."
옛날옛적 마수대에서 근무하던 놈, 그놈의 총… 태주는 회로를 멈췄다. 길게 늘어선 여러 전선을 따라 이리 헤매고 저리 헤매 도착한 곳은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멍청한 생각이었다. 최무진이 알아서는 안 된다. 최무진이 직접 나서게 해서는 안 된다. 태주는 정직한 헛웃음을 뱉었다. 본인이 진실을 고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지우를 생각하시는 겁니까? 아무런 자각도 없이 내뱉은 가소로운 과거의 질문에 노여움이 샘솟았다. 심장이 잠시나마 멈춘 것 같았다. 진리는 오직 본인만이 알고 있어야 한다. 태주는 굳어진 손으로 조진세를 살포시 밀었다. 우발적이었으나 계획적이었다. 머릿속이 담배 연기로 뿌옇게 가려져 버린 듯했다. 역겨운 비린내가 심장을 쿡쿡 찔렀다. 태주의 삶은, 오로지 최무진과 동천파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낯선 불청객이 끼어들어온 것은 오래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애를 사랑하는 것조차 태주의 수많은 이름들 중 하나였을 뿐이다. 그러니까 본래의 태주에게 아무런 위협도 가하지 않을 것임을 확신했으나, 안일한 태주는 세상의 진리를 다 알지 못하였다. 사랑보다 위대한 감정은 없다는 걸 너무 늦은 나이에 깨우쳤다. 사랑에 눈멀어 아둔해지고 만 멍청한 정태주, 그애는 틀림없이 이따위의 수식어를 붙여줄 것이다. 발치에 불이 채 꺼지지 않은 담배 열댓 개가 쌓일 무렵까지 태주는 한 발 자국도 움직이지 못했다. 한없이 음침한 바다에 그대로 빠져 죽고 싶었다. 누구도 알지 못하길 바랐다. 설령 그게 본인일지라도. 이건 그애의 명백한 신호였고, 눈앞에 빤히 보이는 진실을 외면하지 말고 본인에게로 오라는 명령이었다. 태주는 충실한 개새끼였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가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곳으로 달렸다. 그리고 그것이 태주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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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은 아무런 소음도 없이 조용했다. 소름이 끼칠 정도의 정적, 그러나 태주는 그애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낯선 곳에서 들려오는 유일하게 낯익은 숨소리가 그 이유였다. 태주는 뒷주머니에서 칼을 빼들었다. 적어도 칼이라면, 정동길처럼 한 번에 나가떨어지지는 않을 테니까. 배신자였다. 끝까지 추궁해서 그 저의를 밝혀내고 종국엔 살해해야 한다.
"내가 말했었지?"
"…."
"조직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고."
태주의 목소리는 쉴 새 없이 떨리고 있었다. 칼을 고쳐잡았고,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 배신자에게 경계 태세를 갖췄다. 온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기분이었다. 칼을 겨누고 있는 상대가 그애가 아닌 저의 심장 같았다. 지독한 적막의 무게가 다리를 짓눌러 허벅지가 끊어질 듯이 아팠다. 지금 태주의 꼴을 본떠 죽기 직전의 그 따위의 제목으로 작품을 낸대도 사실적인 묘사와 초월적인 감정 표현으로 추앙받을 것이 뻔했다. 그만큼 정태주는 지금 죽음을 목전에 둔 실험쥐의 심정이었다. 네가 스스로 멍청해지기를 택한 게 아니고서야 총을 도로 돌려놓을 리 없으니까. 자발적으로 퇴화하는 족속들은 그저 빌어먹을 사랑을 할 뿐이지. 태주는 목까지 올라온 말을 간단히 삼켰다. 지우가 태주에게로 성큼 다가온 순간이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가까웠을까. 조직을 배신한 비겁자를 도대체 언제부터….
"너도 마찬가지야. 형님은 배신자를, 반드시 직접 죽인다. 숨이 끊어지는 그 마지막 순간을 보기 위해서."
본능적으로 올라오는 숨이 단번에 토해졌다. 기묘하게도, 그 순간 방안에 채워진 것은 살기도, 적의도 아닌 위화감이었다. 언젠가 지우와 마주쳤던 찰나 뇌리에 스쳐지나간 감정. 태주는 그대로 쓰러지고 싶었다. 좁디좁은 창문에 몸을 구겨 넣고 머리부터 떨어져 내리고 싶었다. 하지만 겁 없이 다가온 지우는 태주의 신경을 가만 쉬도록 놔두지 않았다. 온몸이 울렁울렁해져선 그 둥그런 눈조차 흐리게 보였다. 흐물흐물한 눈에 태주가 비치고, 태주의 눈빛에서 지우의 얼굴이 보였다. 태주는 잠시나마 손에 힘을 풀었다. 그리고 나머지는 순식간이었다. 진득한 피의 폭포가 손가락 끝에서 느껴졌다. 태주의 칼이 흘러들어 간 곳은 지우의 왼쪽 복부였다. 지우는 태주의 손을 그러쥐고, 우수수 떨며 칼을 빼냈다. 검은 옷에 붉음이 물드는 것은 찰나였다. 태주는 한동안 사고를 하지 못했다. 본인이 찔렀으나 본인이 찌르지 않았다. 몸에 자석이라도 대놓은 듯 이끌려, 그야말로 흘러들어 갔다. 생명의 꿈틀거림이 손끝에 선명하게 느껴질 때까지 태주는 자신이 지우를 찔렀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했다. 피에 물든 쇠붙이가 댕그렁 떨어져 바닥을 적셨다. 곳곳에 지우의 피가 묻어있었다. 둥그런 눈이 세모가 된 지우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동천파에서 태주라는 이름을 받은 이래 피가 두려웠던 적은 손에 꼽았다. 태주는 그저 그런 인간이었으므로 조직원들을 믿고 아꼈으나, 더러운 뒷 세계에서 목숨 몇 개는 껌값이었다. 하나하나 동요할 수 없었다. 그런 태주가 배신자의 피 몇 방울에 휘둘리고 있다. 태주는 지우의 뒤통수를 간신히 좇았다. 단단히 붙어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몇 번이고 시도해 떼어냈다.
"… 언제부터야."
"네가 나를 그 개 같은 눈깔로 쳐다보기 시작했을 때부터."
정태주, 죽여. 지우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남들에게 보여주지 않는 눈이라는 건, 시선의 대상만이 자각할 수 있는 눈빛이라는 걸 망각하고 있었다. 어느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 없던 더러운 눈깔을 지우는 이미 알아채고도 남았던 것이다. 태주는 지우가 숨이 헐떡이는 걸 가만히 지켜보았다. 눈앞에 배신자가 있었다. 날 죽인대도 네 알량한 인간성은 다시 돌아오지 않겠지만. 그렇게 비웃으면서. 태주는 단 한 마디라도, 지우의 입에서 결백하다는 소리가 나오기를 빌었다. 도강재가 확실하다고, 그날 정동길의 심장에 총을 겨눈 도강재를 본 사람이 있다고, 아버지의 총은 그저 경찰의 것이라 돌려주었을 뿐이라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그대로 지우가 토해내기를 바랐다. 그러나 윤지우는 입 한 번 뻥긋하지 않았다. 심장 아래 칼이 깊게 박힐 때까지 억울하단 소리 한 번을 들을 수 없었다. 다만 지우는 세모난 눈으로 태주를 노려보고는, 희미한 숨결을 목 아래 박아 넣었을 뿐이다.
"넌 나한테 사람이 되고 싶은 거잖아."
날 멋대로 죽이면, 최무진이 칭찬이라도 해줄 것 같아? 동천파는 머지않아 무너질 거야. 날 포섭하면 또 모르겠지만. 난 아빠처럼 되기는 싫거든. 수많은 가설들 아래 깊이 잠겨있던 진리를 깨달은 느낌이었다. 진실이라 믿었던 것이 통째로 부정당하고 스멀스멀 흐물텅한 것들이 몰려 들어왔다. 분노, 노여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부정적인 것들의 한계. 그리고 그 너머까지.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정교한 철창이었다. 그 안에서 쳇바퀴를 굴리고, 눈을 부릅뜨고, 그게 지우한테는 그저 실험쥐의 평범한 일상이었던 거다. 기회주의자의 미련함은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다. 모든 걸 알고 있음에도 감히 올려서는 안 될 단어를 입에 담는 것이 치가 떨렸다. 태주는 그때서야 지우가 왜 얌전히 찔려주었는지, 인간성을 논했는지를 이해했다. 정신이 아찔할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태주는 최무진이 아닌 다른 이가 원하는 대로 행동해서는 안 되었다. -너는 이런 얼굴로 죽을 거냐? 더 이상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태주는 바닥에 달라붙은 칼을 집어 들었다.
한때 아빠와 함께했었던 동천파의 조직원. 송준수의 자리를 꿰찬 비렁뱅이. 어쩌면 태주는 정말로 사람이 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네가 진실을 깨우치지 못했다면, 그 무엇도 알지 못했다면 우리는 고작 비겁자와 살인자가 아니었을 수도 있는데. 복수를 하러 들어온 윤지우는, 더러운 동천파에서 더러운 기회주의자가 되어 배신자의 딸을 사랑한 더러운 실험쥐에게 죽었다. 복수조차 하지 못하고. 그러나 부녀가 같은 사람에게 죽지 않은 것은 어쩌면 다행인 일이다. 지우의 숨이 끊어지는 그 마지막 순간, 진리를 깨우친 것은 자신이 유일했기 때문에.
- 지우가 조직에 들어온 것은 어린 날 저질렀던 죄악에 대한 회개와 관용을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건 죄악이 아니었습니다.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