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
@영(0wallst)
아빠의 죽음 앞에 내가 내민 변명은 고작 무지였다. 어리고 아무것도 몰랐던 나는 더는 곁에 없는 아빠를 자주 미워했고 전자레인지에 돌린 딱딱한 밥과 조미료 맛 가득한 반찬을 씹는 날마다 텁텁한 원망에 목이 막혀 플라스틱 생수통을 자주 구겼다. 미움은 한동안 내 삶의 원동력이었다. 원동력이라고 말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바퀴 하나 빠진 것 같은 인생이 덜그덕거리며 굴러라도 갔으니 그런 줄 알았다. 조폭 딸이라고 부르는 애들 뺨을 후려치며 머리채를 잡고 싸운 뒤, 내 손으로 명찰 떼어내고 자퇴한 날. 지겹도록 쫓아다니는 경찰차의 사이드 미러를 차버리고 형사들 피해 죽기 살기로 뛰어 혼자 바다 찾아갔던 그 날. 파고드는 겨울 바람이 얼마나 차가운지 잊을 정도로 아빠가 미웠다. 열을 펄펄 내며 정말 최악의 생일이라고, 조금만 지나면 나도 성인이니 더는 아빠 같은 거 필요 없다고 잔뜩 위악을 떨었는데. 뜨거운 피를 쏟는 몸으로 현관문 앞에 스러진 아빠를 껴안고 목 놓아 우는 사이 나동그라진 꽃다발은 붉게 젖어 들었다. 이런 게 바로 진짜 최악이라고, 더 나빠질 게 없다는 네 생각은 오만이라고 알려주는 듯했다. 그렇게 나는 떨어진 벼락처럼 누가 주는지도 모를 벌을 받았다.
빌려 입은 상복은 소매가 짧았다. 조문객은 많지 않았고 사람들은 칼 맞아 죽은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쉽게 입에 올렸다. 나는 이번에도 손가락 끝에 섰지만, 부검 때문에 벌어졌던 가슴을 기워 맞춘 몰골로 누워 마지막이랍시고 내 손 한 번 잡아주지 않은 아빠를 미워하느라 눈총이 따가운 지도 몰랐다. 그리고 아빠를 향한 그 모든 미움을 합친 것보다 더 내가 미웠다. 너무 너무 미워서 죽을 것 같았다. 볼과 혀를 씹어 피를 냈다. 손톱과 손등의 여린 살을 뜯기도 했다. 차라리 기절이라도 하면 좋을 텐데. 나 때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에는 삼일까지 필요하지도 않았다. 불 속에 들어가는 관을 보며 제대로 울지도 못 했다. 유골함 끌어안고 집으로 돌아와 하루는 꼬박 잠만 잤고, 다음 하루는 전부 눈 뜬 채 보냈다. 눈만 감으면 현관 앞에 섰다. 아빠의 뒷모습은 너머의 작은 그림자를 좇느라 분주히 굴러가는 눈의 실핏줄이 전부 터졌다. 충혈된 눈으로 전단지를 돌리고 붙였다. 그러다 다시 그를 만났다. 오백만 원짜리 부의금과 향 대신 피워둔 담배. 처음으로 맞았던 뺨. 더는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살 수 없었던 내가 죽음 앞에 기껍게 목덜미 내민 그 날, 그의 곁에는 당신이 있었다.
당신은 내가 싫은 듯했다. 체육관에 밴 땀내만큼이나 노골적인 배척과는 다른 결의 감정이라 오히려 무시하기 어려웠다. 저열한 농지기가 지겨워 밤마다 홀로 연습하다 보면 헝클어진 넥타이 맨 당신이 체육관으로 들어오곤 했다. 늦은 밤이 대부분이었고 가끔은 새벽이기도 했다. 느껴지는 인기척에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면 언제 봤냐는 것처럼 지나가 계단을 오르는 뒷모습이 있었다. 좆같이 구는 남자 새끼들을 티 나지 않게 막아주는 게 내심 고마워 그 뒤통수에 대고 다시금 인사를 했다. 그렇게 귀 막고 입 가린 채 몇 년 구르다 보면 강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가 말했던 사람을 죽이는 사람이 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얼마 살지도 않은 생에 무슨 파도가 이렇게 많은지. 승리의 단맛은 잘못 마신 물에 씻겨 내려갔고 욕심 내지도 않던 천만 원을 목숨값으로 치를 뻔했다. 내밀지도 않은 목덜미에 서늘히 겨눠진 위협보다 산산이 조각난 유골함이 더 두렵고 아팠다. 소리 죽여 울고 나니 벌어진 상처를 꿰매는 동안에는 눈 젖을 일 없었다.
"다 울었으면 이제 가라."
엉망이 된 자리를 간신히 수습하고 철문을 열자 당신은 말했다. 나는 아직도 내가 너무 미웠고 있을 자리는 몽땅 잃은 지 오래이므로 퉁퉁 부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대꾸한다. 멈추기에는 이미 늦었습니다, 하고. 대답에 골치가 아픈 듯 인상을 쓴 당신을 두고 돌아서면서도 나는 당신이 갖고 있는 아빠에 대한 기억이 내심 궁금했다.
그리고 하늘이 찢어진 것처럼 비가 내린 그 날 윤지우는 죽고 오혜진이 만들어졌다. 오혜진으로 살기 위해 자는 곳을 옮기고 혼자 훈련하기 시작했다. 완전히 혼자는 아니었다. 가끔 그가 들러 얼마나 늘었는지 봐주기는 했지만 내 상대는 대부분 당신이었다. 훈련을 할 때는 일전의 대화를 따로 언급하지 않았기에 나도 모른 척 그 앞에 서서 주먹이나 휘두르고 말았다. 엎어치기를 당하고 뺨을 맞아 부어 터져도 굳이 날 세울 일 없이 평탄한 나날이었다. 좀 심하게 다친 날은 얼음 채운 봉투와 약을 던져주고 덤덤히 돌아서는 당신에게 고마웠지만, 그만두라는 말이 마음에 걸려 인사 없이 받아만 들었다. 그렇게 나는 하는 수 없이 당신을 이전보다 자주 눈에 담았다.
가끔은 함께 앉아 식사를 했다. 편식하지 말라는 잔소리를 얼마 만에 들었더라. 앞으로 밀어주는 반찬을 곧이 곧대로 먹고 있다가 보면 비어있던 컵에 물을 따라주었다. 살림살이라고 부를 것도 없는 황량한 공간이었지만 당신과 있으니 사람 사는 집 같았다. 자주 들리는 게 좋아 밥도 더 많이 먹고, 약도 더 많이 바르고, 밴드도 하나 쓸 거 두세 개씩 썼다. 빠르게 동이 나는 약과 붕대 따위를 보며 한숨을 참는 등 뒤에서 나는 비죽 나올 것 같은 웃음을 삼켰다.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주먹질은 정직하게 늘었다. 칼이 다가오는 방향을 읽을 줄 알게 됐고, 총을 쏘면서도 더는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 실력이 느는 동안 공부도 열심히 했다. 정말이지 죽을 것처럼 했다. 예상에 없던 수험생 보필에 난처한 기색을 보이던 당신이 간식 삼으라며 사다 준 포도가 그해 여름 유난히 달았다. 가을에는 길었던 머리를 귀 아래까지 잘랐고, 겨울에는 당신에게 담배를 배웠다. 메케하고 뜨거웠다. 돌아오는 기일에 맞춰 제사를 치렀다. 상에 올린 배와 사과는 문 앞에 놓여있던 봉투 속에 가득 들어있었다. 보낸 이가 적혀있지 않아도 정태주라는 이름 석 자를 읽을 수 있었다. 두 번 올리는 절 끝에 눈물이 비집고 나왔지만 꾹 참았다. 그날은 첫눈이 내렸다. 이듬해 경찰 시험에 붙어 정복을 입은 내 모습을 보는 그는 뿌듯해했고 당신은 어쩐지 서글퍼 보였다. 복수에 가까워질수록 동천파와는 멀어져야 한다는, 하지만 네가 누구인지 잊지 말라는 그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한 줌뿐인 전부는 여기에 두고 표식처럼 윤지우라는 이름까지 파묻었으니 내가 누구인지 잊을 리는 없었다. 당신에게 운동화를 선물 받았다. 시험 삼아 통, 통 발을 구르며 뛰자 오랜만에 웃음 한 번 엿봤다.
일을 시작하고 자주 다쳤다. 상처 늘어나는 속도를 버티지 못한 몸이 앓을 때면 머리로 외운 당신의 번호를 힘줘 눌렀고, 신호음이 몇 번 가기도 전에 답하는 목소리가 좋아 일부러 말을 아꼈다. 구구절절 늘어놓지 않아도 전화를 끊고 얼마 후면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났다. 열감으로 머리가 뜨거운데도 당신 생일을 몰래 섞어 넣은 그 번호를 알아채 주었으면 했다. 엄살 피우며 팔을 벌리면 못내 안아주는 품에는 겨울바람이 묻어 차가운 냄새가 났고 나는 그 냄새를 오래도록 사랑할 것이라 확신했다.
왜 섣부른 확신은 오해와 기만으로 돌아오는가. 사람의 기억이라는 건 못내 어리석어 자잘하게 놓여있던 거짓의 흔적을 놓친 채 읽고 싶은 것만 읽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죄 묻은 손으로 펼친 아빠의 유서와 목전에 닿아온 진실의 무게에 질식할 것만 같았다. 구역질과 함께 귓가로 연신 총성 터진다. "이 멍청한 년아. 너는 아무것도 몰라." 비아냥대는 목소리가 울린다. 그래, 씨발. 네 말이 다 맞았다. 갈수록 수척해지는 얼굴에 의아하던 내 손을 뿌리쳤던 행동과 틈을 놓는 언사가 이런 이유였나. 첫눈이 내린 그 날 밤새 기다리고도 보지 못한 당신과 오지 않은 전화가 내심 서운했던 나를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속인 걸까. 그의 속셈을 모르지 않았으면서 왜 말해주지 않았을까. 그 현관 너머 그림자가 당신의 것이라면 나는 어떻게 해야 좋을까.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어쩌자고 당신보다 내가 더 미운 건지.
주제도 모르고 정 붙였던 모두를 죽이기로 마음먹는다. 일생 벼르던 일이니 못할 이유 없다. 도륙 난 마음이야 이미 오래전부터 진창이었고 팔다리 내놓을 각오쯤은 지금 겪는 아픔보다 가벼웠다. 돌아서 향하는 그 길에 분명 있을 당신을 염려하다 일평생 닿은 적이라곤 없는 것처럼 마주했다. 나는 아무래도 멍청한 년이 맞나 보다. 이렇게라도 볼 수 있어 좋은 걸 보면. 거울에 비친 당신의 뒷모습이 그리웠는데. 지금 하고 있는 넥타이 사다 줬을 때 당신 얼굴 참 예뻤는데. 눈물이 아른댄다. 정태주. 나는 이제 나를 미워하는 힘으로 당신을 죽여볼까 해. 칼로 고백한다.
답신은 목숨으로 받았다.
당신까지 죽였으니 이제 내가 못 할 건 없다고 생각했다. 모진 말 잔뜩 뱉고 내 손에 무참히 죽어준 걸 고맙다고 할지 원망을 할지 모르겠어 난도질 된 가슴팍에 기대 한참 울었다. 방금 거둔 숨을 입술 사이로 불어넣으며 살아나라고 살아나기만 해보라고 윽박지른다. 손은 따뜻한데 아직 있는 거지. 여기에 있지. 물으면 어깨에 기대오는 몸에는 힘이 없다. 품 안을 뒤지면 담배와 라이터가 고작이다. 당신은 나한테 이렇게 헛헛하게 죽으러 왔니. 물어도 돌아오지 않는 대답이 나를 서럽게 해서 조금 더 울었다. 오래전부터 묻고 싶었다. 사람이 괴물인 척 굴면 괴물 되는 거냐고. 유골함 끌어안고 울던 열일곱에게 눈길 주고, 샌드백 끼고 살며 악다구니 쓰는 열여덟한테 끼니 챙겨주고, 숨이 차 죽겠다며 매달리는 열아홉한테 입술 대신 담배 물려주고, 이제 다 컸다고 덤비는 스물한테 못 이기는 척 져줘 놓고 당신이 괴물이라고. 그렇게 괴물로 키우려고 볕 안 드는 자리에 두고 마음 곯게 키웠으면 정이나 주지 말지. 그래서 정작 사람이었던 당신은 나를 사랑했냐고. 나는 배운 적 없어 모르지만 그게 사랑이 아니면 도대체 무엇이었냐고.
울 시간이 없어 애도도 양껏 못 한다. 불 붙인 담배 연기 머금고 당신 입술에 나눠준 뒤 가슴팍에 꽂힌 칼을 보며 이를 갈았다. 나는 괴물로 길러졌지만 사람이었다가, 마침내 사람이던 당신 죽여 괴물이 됐다. 고맙다고 하면 울겠지만 그래도 고마웠다고. 스물둘에는 고백도 이 갈며 한다. 이것도 다 당신한테 배웠는데. 전부 끝나면 내 손으로 거둔 숨 하나씩 모아 번듯한 장례 치르겠다고 약속해. 당신 내 말 듣고 있니. 얼마 남지 않았어. 그러니까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지옥에서 기다려. 늦지 않게 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