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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끝자락
​@세레니티(Serenityfellin2)

 초여름의 신영고. 초록이 느릿이 피는 계절. 따갑게 쬐여오는 햇빛을 그대로 맞으며 윤지우가 운동장 한복판에 서 있다. 멤멤 울려 퍼지는 매미소리까지 가세하니 윤지우는 그저 여름이라는 화폭 속에 들어있는 하나의 피사체 같았다. 윤지우는 제 어깨에 메여진 가방이 어색했으며, 제 앞에 놓인 '신영고등학교' 라는 글자가 어색했다. 1년 전 도망치듯이 떠나버린 그 학교에, 제가 다시 발을 들여놓는다는 게 윤지우는 새삼 기분이 이상했다. 여태 해온 거라곤 미친 듯이 사라진 아빠를 찾는 일. 그러나 이제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야 할 시간이었다. 윤지우는 천천히 복도로, 그리고 2-9반이라 적힌 교실로 들어간다. 

 2-9반. 

 2학년 9반에는 다양한 부류가 존재했다. 공부에 손도 대지 않는 학생들과 아예 전교권에서 노는 학생들. 그러나 전자에 속한 학생들이 대부분으로 후자는 반에서 아주 적었다. 그러나 이 반에는 반의 핵심인 정태주가 있었다. 전교 1등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신영고의 수재. 선생들의 사랑이란 사랑은 전부 받는 정태주가 있었다. 그러나 정태주는 말 수가 그리 많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말주변이 좋아 친구가 많은 것도 아니었다. 정태주는 남에게 관심조차 주지 않는 편이었다. 정태주가 헌신하는 것이라곤 공부 뿐이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걸 일찍부터 깨달았기에 정태주가 목숨 거는 것은 단지 공부였다. 정태주를 한 문장으로 표현하자면 그저 평범하게, 대학을 잘 가고 싶은 조금은 이기적인 학생이었다. 

 그러나 2학년 9반에 윤지우가 들어온 이후로 모든 게 달라졌다. 남녀 합반이 된 지 얼마나 됐다고 교실은 시끄러워졌고 몇몇 아이들은 윤지우를 못살게 굴었다. 정태주와 윤지우는 같은 반이라는 사실이 무색할 만큼 접점이 없었다. 시선 한 번도, 옷깃 한 번도 스친 적 없었다. 정태주는 공부만 하느라 자리에서 벗어나질 않았고, 윤지우는 떠도는 소문에 맞춰 행동해주느라 비교적 자리에 있질 않았다. 물론 윤지우가 꼴통이라는 소문은 반은 맞았고 반은 틀렸다. 소문이라는 게 원래 돌고 돌아서 와전되기 마련이니까. 정태주는 남의 소문따위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중요한 것은 자신 뿐이었으니까. 

 그러나 말거나 별 관심은 없었으나 반이 시끄러워지는 건 질색이었다. 문제에 나오는 지문을 읽어야 하는데 반에서 들려오는 이래저래 큰 소리들과 욕설 담긴 말들은 정태주의 신경을 건드렸다. 분명 윤지우가 오기 전 시끄러운 반 분위기일 때는 그저 무시하고 넘길 수 있었는데, 윤지우의 이름이 들어간 욕설들은 이상하게 불쾌하고 자꾸만 귀에 들렸다. 그럴 때마다 정태주는 한숨을 푹 내쉬고 교무실로 가 담임을 데려온다. 담임이 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반은 다시 조용해졌다. 정태주가 담임을 데려오는 명분은 반에 스피커가 고장 났다거나, 바닥이 미끄러워서 공부가 안된다거나. 뭐 그런 쓰잘데기 없는 이유를 댔다. 차마 윤지우의 이름을 입에 담기에는 그렇다 할 이유가 없었기에. 

 그렇게 시간은 흘러간다. 별 접점없이, 윤지우는 늘 홀로, 정태주도 홀로, 같은 곳에 있지만 둘은 서로 다른 홀로서기를 한다. 그렇게 아무런 교차점 없이 지나갈 것 같던 둘에게도 변화가 생긴다. 그러니까 사건의 전말은 정태주로부터 시작한다. 

 생기부를 채워야 하는 정태주에게는 공부 말고도 해야 할 일이 많았다. 그런 태주에게 멘토멘티를 하라는 담임의 제안이 있었다. 멘토멘티가 아주 좋은 생기부 거리라고. 정태주는 멘토멘티가 하기 싫은 것은 아니었으나 꽤 곤란한 점이 있었다. 정태주에겐 멘토멘티를 할 마땅한 친구가 없다는 사실. 공부와 친구 둘 중 하나를 택하라면 정태주에겐 공부가 우선이었다. 그래서 어쩐지 정태주의 주위에는 사람이 없었다. 정태주는 착잡한 표정으로 멘토멘티 안내서를 들고 복도를 걷는다. 시야로 보이는 2-9반은 또 다시 시끌벅적한 듯 보였다. 한명을 빙 둘러싸고 차례대로 폭언을 가하는 장면이 정태주의 시야에 담긴다. 쟤네는 지겹지도 않나. 빙 둘러싼 사람들 사이로 간간히 보이는 윤지우는 결코 굴하지 않았다. 딱히 어떤 표정을 담지도 않았고,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다. 가끔 제 몸을 건드리려는 손만 쳐낼 뿐. 그 모습을 보는 정태주는 윤지우가 참 끈질기다는 생각을 한다. 어쩌면 그게 좋았을 수도 있고. 때문일까 정태주는 발걸음에 속도를 올려 소음 속으로 성큼 걸어 들어간다. 

 

 - 나와. 담임이 멘토멘티 하래. 

 

 소음 속에서 선명하게 어떤 목소리가 들린다. 윤지우의 시야를 가득 메우던 수많은 다리들을 비집고 들어온 누군가가 어떤 종잇장을 내밀고 있었다. 순간이 너무 비현실적이라 윤지우는 제가 보고 있는 게 현실인가 싶어 고갤 올려 태주와 시선을 마주한다. 하복 가슴팍에 적힌 명찰에는 '정태주'라고 적혀 있다. 검은 머리칼에 가려져 살짝 보이는 눈과 순간 시선이 맞닿는다. 윤지우는 아무 말 없이 정태주가 내민 종이를 받는다. 거기에 뭐가 쓰여 있는지도 모르고. 그리고 일어선다. 영겁처럼 느껴지던 길고 긴 점심시간이 찰나의 순간으로 바뀐다. 

 

 

 윤지우와 정태주는 서로를 바라본 채로 앉아있지만 누구 하나 먼저 선뜻 입을 열지 않는다. 정태주가 제 앞에 놓여있는 '멘토멘티 안내서'를 윤지우에게로 민다. 윤지우가 시선을 종잇장으로 옮긴다. 멘토멘티? 오랜만에 보는 낯선 단어에 헛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제가 공부를 관둔 지가 얼만지. 자그마치 1년이었다. 윤지우는 1년 전, 딱 이맘때쯤 사라진 아빠를 찾으러 학교를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여전히, 아빠는 찾지 못 했다. 이제 힘이 빠져 학교로 돌아온 것뿐이었다. 돌아온 학교에선 조폭 딸이라는 소문이 돌았고, 아파트 이웃들에겐 그저 불쌍한 아이였다. 차라리 조폭 딸이라는 소문이 낫지. 남들의 동정어린 시선을 받는 것은 참 지겹고 버티기 힘들었다. 그래서 윤지우는 꾸역꾸역 학교로 돌아왔다. 조폭 딸이라는 게 뭐 어쩌라는 건진 모르겠지만, 학급 분위기를 망친다느니 뭐니 시비를 걸어오는 애들이 있었다. 윤지우에게 그런 거쯤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아빠를 찾으면서 더한 짓도 해봤으니까. 그러나 저를 그 진흙탕 속에서 끄집어낸 이 남자애는 좀 거슬렸다. 지 앞가림이나 할 것이지. 윤지우는 멘토멘티 종잇장을 다시 정태주에게로 밀어버리며 나지막이 말한다. 

 

 - 소문 못 들었어? 

 - 뭔 소문. 

 - 나 조폭 딸이라는 소문. 그거 진짜야. 

 - 관심 없어. 

 

 정태주는 윤지우가 호기롭게 내뱉은 말이 무안할 정도로 관심이 없다는 태도로 윤지우를 응시한다. 윤지우는 말문이 막혀 정태주의 검은 머리칼부터 시작해서 검은 심연과 같은 눈동자로 시선을 옮긴다. 제 소문에 관심이 없다는 애는 처음이라 윤지우는 막상 할 말이 없었다. 사실 겁줘서 떨어트리려고 한 말이었는데. 윤지우는 뜻밖의 상황에 책상 밑으로 주먹을 쥐었다 핀다. 긴 적막을 깨고 정태주가 먼저 입을 연다.

 

 -  멘토멘티는 점심시간, 방과 후. 하루에 두 번이야. 월화수목요일만 하는거고. 

 - ....나 한다는 말 안 했는데 

 - 안 하면 뭐할 건데? 계속 반에서 시끄럽게 굴겠지. 

 - 네 알 바 아니잖아. 

 - 내 알 바 아닌데. 좀 시끄러워서. 

 

 그러니까 네 소문 없어질 때까지만이라도 협조해. 정태주가 미간 한쪽을 찌푸리고는 윤지우를 응시한다. 분명 저 표정은 매일같이 보는 표정들이었는데 묘하게 기분이 이상했다. 왜 저 찡그림에선 경멸이 보이진 않는지. 윤지우는 의아했다. 저를 그 상황에서 끄집어낸 이유가 고작 시끄러워서라니. 그래. 꼭 누군가를 구할 때 이유가 동정일 필요는 없다. 윤지우는 정태주의 모습을 한번 훑는다. 가지런하게 매여진 넥타이와 매일 새 와이셔츠를 입는 건지 때 한번 묻지 않은 흰 와이셔츠, 그리고 깨끗한 손톱 마저 모든 걸 완벽하게 하길 원하는 완벽주의자 범생이 같았다. 섣부르긴 해도 정태주가 어떤 인간인지는 알 것 같았다. 공부에 미친놈. 공부하는데 시끄러워서 방해가 되니까 조용히 좀 해달라는데. 뭐 할 말이 어디 있겠나. 이 처지에 싫다고 할 수도 없고. 윤지우는 정태주와 시선을 마주하고 말한다. 

 

 - 그럼 그러던지.

  

 때마침 점심시간이 끝남을 알리는 종이 치고, 윤지우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자습실을 나간다. 정태주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기껏 가져온 문제집들과 필통을 챙겨 뒤늦게 자습실에서 나온다. 저 멀리서 저보다 앞서가는 윤지우의 뒷모습이 보였다. 아까는 꽤 충동적이었다. 정태주는 무표정으로 창문을 응시하며 걷는 윤지우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익숙했다. 저 뒷모습이, 그리고 저 미련 없다는 눈빛은 여전히 마음에 안 들었다. 나조차도 꾸역꾸역 살아가는데. 윤지우에겐 삶의 의지라는 게 보이지 않았다. 터벅터벅 걷는 실내화의 마찰음에서도, 흔들리는 머리칼에서 떨어지는 머리카락도. 낙하에 저항하지 않았다. 그게 조금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래서 정태주는 주제넘은 짓을 했다. 이렇게나 빨리 후회할 걸. 정태주가 작은 한숨을 내쉰다. 얼떨결에 아주 이상한 멘토멘티가 시작돼 버렸다. 

 

 

 정태주가 윤지우에게 문제집을 밀고는 '초보자'라 적힌 문제1번을 가리킨다. 윤지우는 눈 앞의 문제집에 의아한 눈으로 태주를 바라본다. 풀으라는 건가. 윤지우가 한껏 의아한 눈으로 정태주와 시선을 마주하고 있자 보다 못한 정태주가 입을 연다. 풀어봐. 정태주가 그렇게 답하자 윤지우는 그제서야 문제 1번으로 시선을 옮긴다. 문제는 고1때 배웠던 수학 문제로 난이도가 낮았다. 말 그대로 '초보' 문제였다. 윤지우가 한쪽 눈썹을 올리고 묻는다.

 

 - 왜? 어차피 보여주기식으로 하는 거잖아. 

 - 나도 그러고 싶은데, 여기 종종 감시하는 선생님 들어오셔. 그니까 할 거면 제대로 해야지. 하는 척이 아니라. 

 

 윤지우는 또 말문이 막힌다. 지금 이 상황에서 욕을 하고 싶긴 한데 할 명분은 없었다. 윤지우는 한숨을 크게 내뱉고 부러 동작을 크게 해 문제를 풀기 시작한다. 정태주가 풀어보라 한 것은 문제 1번 뿐이었으나 윤지우는 단숨에 '고수' 문제인 10번 문제까지 풀어낸다. 정태주는 멈추지 않고 문제를 술술 풀어내는 윤지우를 보고도 그리 놀라는 눈치는 아니었다. 윤지우가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단지 윤지우가 어떤 사람인지, 문제를 풀 땐 어떤 얼굴인지 보고싶었다. 항상 독기에 찬 눈 밖에 못 봤던지라. 윤지우가 문제를 다 풀고 나서 정태주에게로 문제집을 건네자 태주는 말 없이 빨간펜으로 채점하기 시작한다. 슥 슥 동그라미를 치는 소리가 계속해서 나다가 삐끗하는 소리가 들린다. 

 

 - 10문제 중 하나 틀렸네. 잘 했어. 

 - 틀렸다고? 

 - 어. 9번. 

 

 정태주의 말에 그제서야 윤지우의 눈에 물음표가 생긴다. 도저히 자신이 어디서 틀렸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윤지우의 표정에 정태주는 9번 문제를 가리킨다. 윤지우는 정태주가 가리킨 문제를 다시 가져가 풀기 시작한다. 윤지우는 풀면서 계속해서 눈썹을 찡그린다. 도저히 다시 풀어도 똑같은 답이 나왔다. 플러스 마이너스 정확하고, 덧셈 뺄셈 곱셈까지 전부 완벽한데. 이 답이 아니면 다른 답이 없는데. 윤지우가 다시 문제를 정태주에게로 들이밀며 말한다. 

 

 - 어디가 틀렸는데? 없는 것 같은데.

 - 맞아 없어.

 - 뭐? 

 

 지금 장난하냐? 시발... 윤지우가 나지막하게 욕지거리를 내뱉는데 마침 밖에 있던 선생이 문을 연다. 그 자그마한 욕지거리를 들은 건지 문을 반쯤 연 선생이 멈칫한 채로 눈썹을 치켜뜬다. 윤지우와 정태주가 동시에 들어온 선생님에게로 고개를 돌린다. 정태주와 윤지우를 번갈아 가며 보던 선생은 '윤지우, 정태주 감점'이라 말하곤 다시 문을 닫는다. 적막이 멤도는 자습실에서 정태주와 윤지우가 시선을 교환한다. 윤지우는 묘하게 시선을 다른 곳으로 둔다. 벌점에 타격을 받는 건 태주가 분명했다. 태주가 작게 한숨을 내쉬고 말한다. 

 

 - 봤지. 앞으로 욕설은 금지니까 하지 마. 

 - 야. 아까 그거나 해명해.

 

 네가 너무 의욕이 없길래. 의욕 좀 돋구려고 해본 말이야. 정태주가 덤덤히 윤지우를 응시하며 말한다. 네가 여길 너무 불편하게 생각하는 것도 있고. 정태주가 윤지우 앞에 펼쳐진 문제집을 회수하고는 자신이 풀던 문제집을 지우에게 건넨다. 이걸로 풀어봐. 못 푸는 거 있으면 물어보고. 정태주는 윤지우에게 문제집을 내밀고 자신은 또 다시 옆에 산처럼 쌓인 문제집 중 하나를 골라 펼친다. 윤지우는 제 옆에서 말 없이 문제만 푸는 정태주가 심상치 않은 또라이처럼 느껴져 일부러 몸을 다른 쪽으로 틀고 문제를 풀기 시작한다. 윤지우는 오랜만에 접하는 고난도 수학 문제를 보고 있자니 정말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그니까, 아빠와 제대로 된 아침밥을 먹고, 학교에선 친구들과 하하호호 떠들고 공부까지 열심히 하던 그 일상으로. 그러나 이 상황이야말로 그 일상이 온데간데없어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기도 했다. 윤지우는 샤프를 잡은 손에 힘을 준다. 

 정신 차리자고 생각하곤 다시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고 있자니 이상하게 막히는 곳도 생겼다. 아무래도 1년 치 공부를 미뤄뒀으니 막히는 부분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윤지우는 차마 정태주에게 알려달라는 말을 내뱉기가 싫었다. 누가 이런 지밖에 모르는 놈한테 가르침받고 싶어 한다고. 윤지우가 혼자서 몇번이고 문제를 다시 풀고 있다는 사실을 정태주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윤지우가 처음으로 지우개를 쓰고 있었기에. 정태주는 문제를 풀다 말고 문제집을 덮는다. 그리곤 자리에서 일어나 윤지우의 옆자리로 자리를 옮긴다. 윤지우는 제 옆으로 훌쩍 다가온 정태주에 미간을 찌푸린다. 제 옆자리에 앉는 정태주에게서 풍겨오는 냄새는 짜증 나게 좋은 섬유 유연제 향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윤지우는 여전히 지우개로 식을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정태주가 윤지우가 문제집에 풀어놓은 식들을 눈으로 훑더니 나지막이 말한다. 너 이 부분부터 안 배웠잖아. 학교 안 나와서. 정태주가 시선을 문제집으로 두다 윤지우와 눈을 마주한다. 윤지우는 삐딱한 시선으로 정태주를 바라본다. 

 

 -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 들었어. 소문으로. 

 - 관심 없다며. 

 - 어. 근데 기억력이 좋아서. 

 

 말문이 막힌 윤지우를 뒤로하고 정태주는 말 없이 문제집의 자그마한 여백 부분에 작게 식을 써 내려간다. 윤지우는 여전히 삐딱한 시선으로 정태주의 행동거지를 살핀다. 정태주는 제가 한 말이 모순적인걸 아는 건지 아랑곳하지 않고 문제를 차근차근 설명하고 있었다. 이렇게보니 정태주. 왜 친구가 없는지 알 것 같았다. 윤지우는 막상 전교 1등도 친구없는 저와 같은 부류라는 생각이 드니 뜬금없이 이 상황이 웃겼다. 순간 윤지우가 피식 웃는다. 정태주는 갑작스레 터진 윤지우의 웃음에 조금은 놀란 표정으로 윤지우를 쳐다본다. 윤지우는 정태주가 저를 쳐다보자 다시 입가에 미소를 싹 지운다.

 

 - 왜 웃어.

 - 하던 설명이나 해. 

 

 정태주가 윤지우의 정색에 다시 제가 써 내려간 식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한다. 윤지우는 흘려듣는 척 하면서도 정확히 정태주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정태주는 전교 1등의 수재 답게 정리해서 말하는 것이 습관화 된 건지, 말하는 족족 잘 알아들게 설명했다. 그래서인지 윤지우는 온통 정태주가 속삭이는 말들로 머리를 채울 수 있었다. 평소 해오던 부정적인 생각이 설 자리가 없게끔, 수학 기호들이 머릿 속으로 물밀듯 밀려온다. 윤지우는 태주의 손에 시선을 맞추고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둘은 꾸준히 점심시간에는 수학 문제를 풀었고 사람 한명 없는 방과 후에는 국어와 영어를 공부했다. 어떻게 보면 정태주가 과외를 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으나 확실한 건 정태주가 윤지우에게 크게 가르친 것은 없었다. 윤지우도 아빠가 사라지기 전까진 '평범한' 우등생이었으니까. 윤지우는 하나만 가르쳐줘도 열까진 혼자 해내는 사람이었다. 멘토멘티 덕일까 시험에서도 높은 성적을 받아 순식간에 윤지우는 전교권으로 들어간다. 윤지우가 정태주와 붙어 다니기 시작하자 반에서 윤지우를 괴롭히는 것들은 전부 사라졌다. 윤지우의 책상은 맨 뒷자리에서 맨 앞자리로 옮겨졌고, 책상에 쓰여있던 험악한 말들은 전부 락스로 지워졌다. 그렇게 반 분위기는 다시 평범하고 조용하던 예전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2학년 9반에는 하나 새로운 소문이 돌았다. 윤지우와 정태주의 기류가 심상치 않다는 소문. 따라서 윤지우의 뒤를 따라다니던 '조폭 딸'이라는 소문은 자연스레 묻히고 ‘전교1등과 사귄다’는 소문이 새로 생겼다. 

 어쩜 그리들 남의 인생에 관심이 많은지. 윤지우와 정태주가 사귄다는 소문은 일파만파 반 뿐만 아니라 학급 전체로 퍼져나갔다. 윤지우도 화제의 인물이었지만 정태주도 전교 1등인 만큼 화제의 인물이었다. 윤지우는 이런 소문들이 지긋지긋해서라도 정태주와 떨어져 걷는다. 윤지우가 복도를 걷는데 얼핏 제 옛 별명이 들리는 듯해 발걸음을 멈춘다. '그 조폭딸이랑 정태주랑 사겨. 내가 직접 봤다니까? '  윤지우는 어느새부터인지는 몰라도 ‘소문’이 거슬렸다. 조폭딸이라는 소문은 애들이 진짜라 믿든 말든 상관도 안 했는데. 이상하게 이 소문만큼은 어떻게서든 정정하고 싶었다. 윤지우가 그냥 지나치려다가 대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라도 들어보자 싶어 발걸음을 멈춘다. 얼핏 듣자하니 저와 정태주가 방과후에 둘이 손 잡고 있는 모습을 봤다더라. 일단 윤지우가 생각하기엔 헛소문이 맞았다. 제정신으로 정태주와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으니까.

 윤지우는 괜히 얼굴이 화끈해지는 것만 같아 빠르게 복도를 지나쳐 자습실에 도착한다. 생각해보면 한 달이라는 시간동안 정태주와 몸이 닿는 일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손을 잡았다거나, 뭐 그런 낯간지러운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내가 언제 저런 애랑 손을 잡았는데. 윤지우는 금시초문인 이 사태가 얼른 사라졌으면 싶어 정태주에게 묻기로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태주가 자습실 문을 열고 들어온다. 정태주는 들어와 윤지우를 응시한다. 태주는 요즘들어 윤지우가 저를 묘하게 피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태주가 부러 소리를 내 묻는다.

 

 - 왜 먼저 가. 

 - 소문 때문에. 누가 너랑 내가 손 잡고 있는 걸 봤대.   

 - 그래서?

 - 뭔 그래서야. 사실도 아닌데 사귀니 뭐니 소문 퍼트리잖아. 짜증나게.

 

 정태주는 주저 없이 윤지우의 옆자리에 앉는다. 그리곤 또, 관심 없다는 태도로 윤지우를 응시한다. 너 그런 거에 관심 둘 정도로 시간 많아? 윤지우가 '그런 거'라는 단어에 꽂혀 미간을 찌푸린다. 나만 소문 도는 거 짜증 나나 보네. 윤지우가 날 세운듯한 말투로 받아쳐도 정태주는 별 감흥 없다는 태도를 유지한다. 어. 난 별로. 정태주는 여전히 산더미처럼 많은 문제집과 필통을 책상 위로 올려놓는다. 윤지우가 꼽주겠다는 표정으로 말한다. 그래. 덕분에 조폭 딸 소문 없어지고 좋네. 윤지우 또한 가방에서 필통과 커다란 문제집을 꺼내고 말 없이 문제를 풀기 시작한다. 문제를 풀면서도 신경은 온통 서로에게 가 있었다. 윤지우는 슥슥 거리는 소리만 들리는 자습실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새삼 정태주가 짜증났다.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윤지우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 수학 기호들을 뒤로하고 볼펜으로 종이를 쿡쿡 찌르다 결심한듯 펜을 내려놓는다. 그러고 보니까 더 이상 이 멘토멘티를 할 이유가 없었다. 처음 시작이 반을 시끄럽게 하는 나 때문이었는데. 이제 그 문제는 풀렸으니 제가 이 곳에 있을 이유는 단 하나도 없었다. 정태주가 없어도 문제가 술술 잘 풀렸고, 덕분에 조폭 딸이라는 소문도 잦아들었다. 윤지우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 문제를 빤히 바라만 보다가 정태주를 부른다.

 

 - 정태주. 이제 나 여기있을 필요 없는데 그냥 너 혼자 해. 

 - 이게 너 끝내고 싶다고 끝낼 수 있는 거냐. 학기 말까지 해야 돼. 

 - 방과후는 빼 그럼. 그거 어차피 의무 아니라 선택이던데.

 - 그래….. 그러던지.

 

 정태주의 말에 윤지우가 다시 문제로 시선을 둔다. 왜인지 모르게 짜증이 났다. 물론 이 재수 없는 전교 1등과 붙어있으면 대부분의 시간이 짜증났다. 정태주는 싸가지가 없고 잘하는 거라곤 공부밖에 없고… 무엇보다 눈치도 없고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저도 비슷하긴 했으나 저 정도까진 아니었다. 재수바가지. 윤지우는 늘 정태주의 뒷모습에 욕을 날리곤 했다. 사람을 시궁창에서 끄집어냈으면 책임을 지던가. 아니면 끄집어내질 말던가. 정태주는 정말 눈치라곤 전혀 없었다. 제가 정말 자발적으로 자습실로 출석 도장찍고 이른 시간에 학교를 오는 거라고 생각하는 건지. 윤지우는 관찰력이 좋았고 정태주의 생각들은 사소한 행동에서 보였다. 정태주의 시선이 닿는 곳이 저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 할 정도로 윤지우가 눈치가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서 윤지우는 정태주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 올 때마다 이도 저도 아니고 계속 말 돌리기 급급한 정태주가, 아무렇지 않은 척해도 샤프심 하나도 제대로 집지 못 하는게 보였다. 윤지우는 그게 답답하긴 했으나 그렇다고 이 재수 바가지를 완전히 떠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사람을 낙원으로 삼아선 안된다지만, 조금만이라도 아주 잠시만이라도 제 텅빈 방 안에 너라는 조명을 달고 싶어서. 그게 아무리 지 멋대로 켜졌다가 꺼지는 조명이래도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윤지우는 무의식적으로 태주를 그린다. 볼펜으로 동그라미를 그리고 검은머리칼을 그려넣는다. 차마 표정은 그리지 않는다. 혹여라도 누가 알아챌까봐서. 요즘들어 정태주에게 채점을 맡기지 않는 것도 그러한 이유였다. 

 

 

 정태주는 제 옆에서 볼펜만을 끄적이는 윤지우에 온 신경을 둔다. 사람 속 뒤집어놓고 그림이 그려지나. 정태주는 방금까지만 해도 큰 산을 넘은 기분이었다. 이유는 고작 윤지우의 멘토멘티를 그만하고 싶다는 선언. 제게도 별 영양가 없는 이 멘토멘티를 계속할 이유가 있진 않았다. 그럼에도 이 어려운 수학 기호들이 담긴 문제집에서 눈을 떼고 고갤 올리면 있는 네가, 그게 이유라면 하나의, 모든 이유였다. 그래서 정태주는 윤지우가 이 짓을 그만둔다는 말이 싫었다. 시작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좋아서 하는게 맞았다. 무의식적으로라도 그런 말이 나올까봐 정태주는 입단속을 철저히 했다. 몇 가지 비밀들을 말해보자면 사실 멘토멘티를 학기 말까지 할지 안 할지는 선택이었다. 그리고 방과 후에 남아서 할지 안 할지도 선택이었다. 그러나 정태주는 윤지우에게 그게 마치 정해진 사실인것처럼 말했다. 이런 것도 하얀 거짓말로 쳐주나? 나 좋으라고 한 거짓말이긴 하지만 말이다. 정태주는 윤지우가 저와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란 걸 알았다. 처음은 충동적으로 손을 내밀었지만 어쩌면 지금의 이 감정이 찰나의 충동이 아니란 것쯤은 알았다. 방금 전, 윤지우가 소문의 진상에 대해 물을 때, 정태주는 순간 뭔갈 들킨 것도 아닌데 딸꾹질이 나올 것 같았다. 그 일은 혼자만 먹으려고 숨겨둔 캬라멜과 같은 비밀이었다. 순간 그 비밀을 당사자에게 들춰질까 심장이 쿵쾅거렸으나 또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다. 그래서? 라고 얼버무렸던 소문의 진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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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니까 여느 날처럼 방과 후 교실에서 윤지우와 정태주 둘만 남아서 멘토멘티를 진행하던 날, 윤지우는 피곤했는지 문제를 풀다가 고갤 몇 번 떨구길 반복했다. 이러다 머릴 책상에 박겠다 싶어 머리가 책상으로 닿을 때쯤 태주는 손을 뻗어 지우의 머리를 손으로 받친다. 윤지우는 낮잠을 자면서도 악몽을 꾸는 건지 끙 소리를 내며 책상에 올려둔 손을 쥐었다 피기를 반복했다. 얼굴을 한껏 찡그리고 주먹을 쥔 손을 부르르 떨기도 했다. 때문에 정태주는 문제가 손에 잡히질 않았다. 옆에서 누가 봐도 악몽을 꾸는 사람이 손을 가만두고 있질 않아서. 정태주는 아무런 말 없이 왼손으로 펜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윤지우의 손을 잡는다. 이럴 땐 양손잡이인 게 도움이 됐다. 윤지우의 손을 잡은 이유는 그냥. 문제 푸는데 움찔거리는 손이 방해돼서. 그게 이유였다. 손을 잡으니 더 이상 윤지우는 앓는 소리를 내지도 않았고 표정을 찌푸리지도 않았다. 그게 전부였다. 한참 동안 손을 잡고 정태주는 문제를 풀었고 윤지우는 햇살을 받으며 낮잠을 잤다. 그걸 애석하게도 누가 봤나보고.  

 그게 소문의 진상이었다. 그래 어쩌면 사랑의 진상일지도 모르고. 정태주는 제 옆에서 몸을 돌린 채로 문제를 풀고 있는 윤지우를 힐긋 쳐다본다. 누군가의 손을 잡을 때 그 이유가 꼭 사랑일 필요는 없다. 그러나 정태주는 그 이유가 꼭 사랑이어야만 하는 것처럼 윤지우를 눈에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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