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거짓말
@마늘(garlicbbahda)
1
오후 4시가 넘도록 지우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아직 해도 안 떨어졌는데 벌써부터 걱정을 하나 싶지만, 초등학교 2학년 치고는 늦은 귀가 시간이긴 했다. 혹시 집을 못 들어오나 싶어서 태주는 걱정이 한가득이었다. 거실만 빙빙 돌다가 외투를 집어 든 순간 현관문이 열렸다. 대문에 달린 종소리가 딸랑 울리자마자 지우 이름부터 불렀다. 왜 이제 들어오냐고 한소리 하려다가 목이 탁 막혀서 아무 말도 못 했다. 저 작은 머리통으로 얼마나 많이 고민했을까. 그 결과가 겨우 긴 머리로 얼굴 가리기라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일단 지우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앉혔다. 그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올려다봤다.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얼굴이 제대로 안 보였다. 슬쩍 검지손가락을 이마 쪽에 끼워 커튼 같은 머리카락 사이를 벌렸다. 언뜻 봐도 이마와 볼에 생채기가 잔뜩이었다. 일단 급한 대로 서랍장을 뒤져 구석에 박혀있는 후시딘을 꺼내 발라줬다. 마지막으로 약국에서 받아왔던 노란색 뽀로로 밴드를 붙였다. 그 사이에 행여 도망갈까 봐 손부터 잡았다. 곧 혼날 낌새를 눈치챘는지 지우 입꼬리가 점점 내려갔다.
“오늘 친구들이랑 싸워서 반성문 썼다며.”
친구들과 싸운 일은 담임선생님께 충분히 혼났을 테니 굳이 그 일로 또 혼내고 싶진 않았다.
“왜 오빠한테는 친구들이랑 논다고 거짓말했어?”
고개를 기울여 눈을 맞추려는데 계속 머리카락 사이에 숨어 나오지 않았다. 지우야. 최대한 상냥한 말투로 불러봤지만, 대답도 없었다. 행여 한숨 소리를 듣고 기죽을까 봐 숨을 천천히 쉬고 지우의 손을 잡았다.
“혼내는 거 아니야. 그냥 솔직하게만 말해주면 돼.”
조금은 다급했다. 엄마가 돌아오기 전 말을 맞춰야 했다. 그래야 지우가 덜 혼나니까.
“물어보기 무서워서…….”
“뭐가 무서웠는데?”
코를 몇 번 훌쩍이던 지우가 조금씩 말을 꺼냈다.
“친구들이, 친오빠면 성이, 같아야 한다고, 나는 송 씨고, 오빠는 정 씨라고, 오,빠랑, 나랑, 은, 가,족, 아니, 아니라고, 애들,이…….”
말을 하다가 서러웠는지 뚝뚝 끊기다가 점점 울음에 먹혔다. 종국엔 서럽게 엉엉 소리를 내며 울었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다른 방에 있던 동생이 놀란 눈으로 방에 들어왔다. ‘뭐야?’ 입 모양으로 묻고 지우를 향해 눈짓했다. 방해만 될 것 같아 오른손으로 어깨를 토닥이며 다른 손으로는 조용히 가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지우 입장에서는 나름 억울했다. 가끔 지우를 보러 오는 엄마랑 아빠도 가족이고, 집에서 엄마와 아빠라고 부르는 선생님들도 가족이고, 아침 준비를 같이하는 언니 오빠들, 모두 지우에겐 가족이었다. 그러니 가족이란 존재를 부정당했으니 화가 날 만했다. 그래서 욱하는 마음에 친구를 밀쳤는데 싸움이 커져서 나중엔 얼굴을 할퀴고 팔을 깨무는 지경까지 갔다. 싸우고 아프고 혼나서 속상해 죽겠는데 태주가 달래주니 더 서러워졌다.
우리 오빠 맞지, 오빠는 지우 오빠 맞지. 숨이 넘어갈 듯 우는 와중에도 진짜 오빠가 맞냐고 묻는데 태주는 선뜻 답이 안 나왔다. 가족의 정의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난감했다. 그저 지우를 품에 안아 천천히 등을 다독거렸다. 우느라 숨도 잘 못 쉬는 지우가 진정할 수 있도록 머리부터 등까지 쓸어내리며 연신 괜찮아, 괜찮아하고 중얼거렸다. 어느 정도 울음소리가 잦아지자 자신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고 있는 지우를 살짝 떼어냈다. 이젠 얼굴을 가리거나 그러진 않았다.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고 눈을 맞췄다.
“앞으로 오빠한테는 다 솔직하게 말해줘. 그래야 오빠가 지우를 도와줄 수 있어서 그래. 자, 약속해.”
서로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절대 거짓말하지 않기로. 그제야 마음이 좀 안심됐다. 적어도 앞으로는 어디서 맞은 일을 숨기진 않을 테니까. 땀과 눈물로 얼굴 여기저기에 붙은 머리카락을 하나하나 정리해줬다. 얼굴이 눈물과 콧물로 난리였다. 책상에 있는 두루마리 휴지를 가져와 몇 장씩 뜯어줬다. 아까는 걱정만 됐는데 이젠 조용히 코 푸는 모습을 보니 슬쩍 웃음이 나왔다. 빨갛게 부은 눈과 볼을 살살 매만졌다. 지우야, 그런 애들 있으면 오빠한테 말해. 오빠가 혼내줄 테니까. 침대에서 일어나 부산스럽게 주먹질을 하며 까불자 지우가 피식 웃었다. 어,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 털 나는데. 아, 오빠! 태주 한마디에 지우가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태주의 행동 하나, 말 한마디면 지우는 잘 웃었다. 웃기는 게 제일 쉬운 동생이었다.
2
이후로 지우는 자주 가족에 대해 궁금해했다. 어떤 것이 진짜 가족이냐며 물음표 폭탄을 던지더니 다음 해 ‘윤지우’로 개명하면서부터 더는 묻지 않았다.
3
늦은 새벽이라 장례식장 안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태주는 들어가자마자 로비에 걸린 모니터로 이름을 찾았다. ‘2분향소 백승한 (남/29)’ 표시대로 제일 안쪽에 있는 빈소에 들어가자마자 상복을 입은 지우가 눈에 들어왔다. 어찌나 오래 울었는지 눈가는 다 짓물렀고 얼굴은 군데군데 빨갛게 부어있었다. 단발머리라 깔끔하게 못 묶어서 머리는 잔뜩 헝클어진 모양새였다. 그 모든 요소가 지우를 한층 더 불쌍해 보이게 만들었다. 멀리서나마 바라보는데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너는 걔를 많이 사랑했나 보구나.
태주가 바로 앞에 앉아도 지우는 벽에 기댄 채로 멍하니 있었다. 남편을 잃은 슬픔에 마치 영혼이 빠져있는 것처럼 보였다. 보아하니 밥도 제대로 못 먹은 듯했다. 지우야. 이름을 몇 번 부르며 어깨를 살짝 흔들자 그제야 태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언제 왔어? 푹 잠겨서 다 갈라진 목소리. 마음이 아팠다. 나오려던 한숨을 꾹 누르고 지우를 일으켜 세웠다. 밥 아직 안 먹었지? 몸이 천근만근인 애를 끌고 테이블 앞에 앉혀뒀다. 급히 안쪽으로 들어가 건더기 푸짐한 육개장을 가져와 지우 앞에 가져왔다. 서둘러 일회용 플라스틱 숟가락 포장지를 뜯어 그릇 옆에 나란히 내려놓았다. 그런데도 먹을 생각이 없어 보여 엄지와 검지 사이에 숟가락을 억지로 끼워 넣었다.
“너 이러다 쓰러져. 네 몸 생각도 해야지.”
우선은 늦게 와서 미안하다 말하고 싶었는데 그런 건 생각도 안 났다. 지우가 빨리 훌훌 털어버리고 예전처럼 금방 웃었으면 했다. 일단 밥부터 챙겨주려는데 지우 입에서 나온 말은 다소 뜬금없었다.
“최근에 승한이 어땠어?”
무슨 의도일까. 지우 어깨 뒤쪽으로 희미하게 보이는 영정사진을 힐끔 쳐다봤다.
“부검해보니까 필로폰이 나왔대.”
몸은 이미 필로폰 중독이었고 부검하면서 배를 갈라보니까 그 안에서 비닐로 싸인 필로폰이 잔뜩 나왔대. 하……. 그러니까 걘, 온몸이 필로폰 투성이었던 거지. 경찰이 나보고 남편이 평소에 어땠냐고 묻는데 할 말이 없더라. 내가, 내가 걔에 대해서 아는 게 하나도 없었어.
곧 울 것처럼 목소리가 떨렸다. 그러면서도 자조 섞인 말투라 중간중간 헛웃음이 끼어있었다. 딱히 해줄 말이 없었다. 뭐, 약쟁이 같은 놈은 잊어버리고 잘 살라고? 혀 아래로 차마 꺼내지 못할 말들이 입안을 간지럽혔다. 까끌까끌한 것들을 종이컵에 담긴 물과 함께 뒤로 삼켜버렸다.
“부부 사이라고 다 알 수 있는 건 아니잖아. 너무 자책하지 마. 네 잘못 아니니까.”
“그게 무슨 말이야?”
눈이 마주치는 순간 턱이 힘이 들어갔다.
“부부잖아. 부부 사이에 숨길 게 어딨어.”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우리가 정말 그동안 못 만나긴 했구나. 언제 이렇게 컸지.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고 싶었는데 해도 되는지 알 수 없어서 가만히 있었다. 애먼 손가락만 테이블 아래서 쥐락펴락했다. 약 석 달 전, 지우와 재회했을 때도 이런 기분이었다. 어딘가 간질거리고 울렁거리는 느낌.
4
두 사람 사이의 긴 공백을 깬 건 지우의 연락 한 통이었다.
‘오빠, 나 지우야.’
센터에 갔다가 우연히 후원자 명단에서 이름을 보고 전화번호를 알게 됐다는 긴 설명과 함께 짧은 근황이 들어간 문자였다. 앞에 줄줄이 늘여놓은 설명은 별거 없었고 뒤에 붙은 짧은 근황이 더 중요했다.
‘결혼할 사람이 생겼는데 오빠한테 꼭 소개해주고 싶어서. 혹시 다음 주에 시간 괜찮아?’
머릿속에 지우와의 첫 만남이 필름처럼 지나갔다. 선생님 다리 뒤에 숨어있던 아직 초등학교도 안 들어간 여자애. 태주보고 오빠라고 부르라는 어른들의 말에 눈치 보다가 슬쩍 손을 내밀던 모습. 얼굴이 어땠더라. 생김새를 떠올리려 해봐도 겨우 명치까지 오는 작은 키만 생각났다. 그야 태주가 보호 종료되면서 그룹홈에 나온 이후로 보지 못했으니 기억 못 하는 건 당연했다. 그래서 의외였다. 나도 희미하게 남은 기억인데. 결혼한다니까 괜히 내 생각이 났나. 괜찮다는 답장을 보내자마자 일사천리로 날짜와 장소가 정해졌다.
몇 년 만이지. 당장 숫자를 세기도 어려운데 몸은 다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저 멀리서 손을 흔들고 뛰어오는 모습에 저절로 발이 움직였다. 그와 동시에 오른팔이 앞으로 나갔다. 넘어지니까 걸어오라고 말을 하려고 했는데 그보다 지우가 더 빨랐다. 휘청거리지도 않고 성큼성큼 다가와 금세 바로 앞에서 마주 봤다. 서로의 눈높이가 제법 비슷했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기분이었다. 이젠 무릎 안 굽혀도 이렇게 볼 수 있네.
같은 차로 이동하는 내내 조수석에 앉은 지우 표정에는 미안함과 민망함이 가득했다. 내가 만든 자리인데 얻어타서 미안해. 상대방이 진심으로 미안해하는데도 태주는 그걸 받아줄 정신이 없었다. 낯선 기분과 약간의 어색함이 합쳐져 지우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도 못했다. 그저 기계적으로 괜찮다는 말만 하며 핸들 잡은 손만 쥐었다 폈다 반복했다.
늦을까 봐 태주 차까지 얻어 타고 온 지우의 노력이 무색하게 정작 예비 신랑이 지각이었다. 십 분 늦은 승한은 태주를 보자마자 죄송하다며 고개를 몇 번이나 숙였다. 그것 빼고는 무난한 식사 자리였다. 하도 오랜만이라 그사이를 메꿀 말들이 너무 많았다. 지우는 태주가 독립한 이후의 이야기부터 최근 신혼집 보러 간 일까지, 다 말해주고 싶었다. 지우가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내면 태주는 가만히 듣다가 중간중간 질문하면서 점점 어색한 분위기가 풀어졌다.
“그럼 결혼하자마자 바로 이사하는 거야?”
“아니. 아직 계약이 잡혀있어서 크리스마스쯤에나 새집으로 갈 것 같아.”
“다음 달에 결혼한다며. 아직 크리스마스 되려면 3달이나 남았잖아.”
“응. 날짜가 애매하긴 한데 돈 아까우니까.”
한참 근황과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쏟아내고 나서야 살짝 틈이 생겼다. 서로 어느 정도 할 이야기가 바닥이 나니 아까보단 조용해졌다. 거기다가 술이 조금씩 들어가면서 격양된 느낌은 가라앉고 소소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러던 중 이사하는 집에 대해 말하다가 승한이 아! 하고 태주를 쳐다봤다. 크리스마스 하니까 생각난 건데요.
“지우가 자긴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산타 믿었다는데 그거, 진짜예요?”
“부끄럽게 그 이야긴 왜 해.”
지우가 산타를 위해 쿠키까지 준비했던 일화를 말하자 승한이 크게 웃었다.
“그럼 언제 산타가 없는 줄 알았어? 설마 아직도 산타 있다고 믿는 건 아니지?”
“어른 돼서도 믿으면 그건 바보지. 애들이 다 그렇듯 나도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알았어.”
한참 떠들다가 가게 마감 시간이 다가와 급하게 헤어졌다. 집에 돌아와 외투를 벗는 사이에 지우에게 전화가 왔다. 잘 들어갔어? 응. 방금 막 도착했어. 곧장 화장실로 가려다가 잠시 소파에 앉았다. 금방 자리를 파한 것이 아쉬웠는지 지우는 사소한 이야기들로 계속 통화를 이어갔다. 그러다 다시 크리스마스 이야기로 돌아왔다. 그러고 보니 아까 묻고 싶었던 게 있는데....
“혹시 내가 산타인 거 알면서도 속아준 적 있어?”
건너편이 조용했다. 끊어졌나 싶어 핸드폰을 귀에서 떼고 화면을 봤다. 14분 27초, 28초. 하나씩 늘어나는 숫자를 보다 지우 목소리에 다시 핸드폰을 귀에 댔다. 피곤해서 그런지 아까보다 더 잠긴 목소리였다. 솔직히 말하면 좀 복잡하긴 한데…….
“아무튼, 오빠랑 같이 살 때만큼은 진짜 산타가 있다고 믿었어. 그리고 내가 눈치는 좀 빠르잖아. 가끔 이상하다 싶을 때도 있었는데 그냥 산타라는 존재를 믿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해. 어릴 때는 그런 환상에 빠지기도 하잖아.”
예상외의 답이었다. 믿고 싶었다는 문장이 밤새도록 태주의 머릿속에 떠다녔다.
5
오래 못 만났다는 이유 하나로 세 사람은 근래에 자주 만났다. 밥도 같이 먹고 집들이 겸 지우 집에 놀러 가면서 점점 가까워졌다. 그렇게 가까워질수록 몰랐던 것들도 하나둘씩 알게 됐다. 이를테면 승한이 그렇게 좋은 신랑감은 아니라는 거. 어느 정도였냐 하면 지우한테 승한과 헤어지라는 말을 어떻게 해야 하나 밤마다 고민할 정도였다. 그게 쌓이고 쌓여 미묘하게 지우와 거리감을 만들었다. 전처럼 불러도 매번 다른 약속을 핑계로 거절만 세 번을 하자 그날 저녁에 연락이 왔다. 진지하게 할 이야기가 있으니 내일 꼭 만나자고. 이것마저 무시할 수 없어 알겠다는 답장을 보냈다. 마음이 무거웠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것 같았다.
카페 같은 곳에서 보는 줄 알았는데 지우는 근처 조용한 공원으로 불렀다. 낮이라 놀이터 근처 벤치에는 아무도 없었다. 서로 나란히 옆에 앉았다. 지우는 본인이 느낀 것들을 하나씩 말했다. 요지는 분명 날 피하는 것 같으니 그 이유를 말해달란 거였다. 쉽게 말이 안 나왔다. 내가 지우한테 결혼을 물리라고 말할 자격이 있나.
“오빠가 그렇게 대놓고 피하니까 승한이 걔도 불편해하잖아.”
넌 이런 상황에서도 걔가 더 걱정돼?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하나 수없이 고민하던 것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됐다. 아무리 기분이 상하더라도 욱하면 안 됐는데, 한번 뱉은 말은 다시 들어가지도 못하고 지우에게 꽂혔다.
“걔랑 꼭 결혼해야겠어?”
지우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최대한 수습하고 싶었다. 절대 꼬투리 잡는 게 아니라는 걸 어필하고 싶었는데 이어서 덧붙이는 말들이 죄다 단점만 따지는 사람 같았다.
“솔직히 직장이 그렇게 안정적인 것도 아니고, 나랑 만나는 자리에서 지각도 잦고. 너한테 잘 보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없어 보여. 그리고 너 아직 어리잖아. 조금 더 고민해보고 결정해도…….”
“난 오빠한테 축하받고 싶은 거지 결혼할 사람 평가해달라고 한 적은 없어.”
아차 싶었다. 단호한 말투에 선을 넘었다는 걸 자각했다. 순간 창피했다. 대체 내가 뭐라고 이래라저래라……. 태주는 급히 고개를 돌렸다. 빨리 대화를 끝내고 싶었다.
“오빠가 보기엔 걔가 한참 부족한 거 알겠어. 마음에 안 찬다는 것도 알겠고. 근데 이제 겨우 일주일 본사이잖아. 좀 예쁘게 봐주면 안 돼?”
“지우야,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내가 오죽하면 그러겠어?”
결국, 그날은 서로 말싸움만 하다가 헤어졌다. 그 후로 사이만 더 어색해져서 전처럼 셋이서 만나는 일이 없어졌다. 결혼하기 직전 지우는 태주 때문에 마음이 뒤숭숭한데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갑작스럽게 승한이 회사를 나왔다며 통보한 날 둘은 웨딩홀 결정하던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싸웠다.
“그렇다고 나한테 상의도 없이 회사를 관두면 어떡해. 너 나랑 결혼하기 싫어서 그래?”
“그런 게 아니라…….”
“당장 내일 돈 보내야 할 곳만 세 군데야. 내 생각은 안 해?”
나는 지금 머리가 이렇게 복잡한데 왜 일을 더 키우냔 말이야……. 여기서 태주 이야기까지 하면 더 큰 일일 것 같아 깊은 한숨으로 말을 대신했다. 분위기가 더 심각해지자 승한이 꺼낸 해결책은 태주였다.
“그럼 형님한테 좀 도와달라고 하자.”
“뭐? 누구?”
눈치도 없는지 승한은 신나게 태주가 예약했었던 식당들을 줄줄이 읊었다. 경제적으로 좀 여유 있으신 것 같던데. 태연하게 태주를 언급하는 꼴을 보니 속이 끓었다. 한편으로는 이래서 반대했나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자기는 염치도 없어?”
“누가 돈 떼먹재? 잠깐만 빌리자는 거지. 가족 좋은 게 뭐냐.”
“가족?”
걔가 어떻게 나랑 가족이야. 거기가 지우의 아킬레스건인 줄도 모르고 승한은 해맑게 지뢰를 심고 있었다.
“친오빠처럼 가깝게 지낸 사이라고 했지 내가 언제 친오빠라고 했어? 태주 오빠한테 손 벌리 생각 절대 하지 마. 연락도 하지 마.”
바로 딱 자르자 승한도 더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렇게 앞에서만 깨갱거려봤자 뭐하나. 바로 다음 날 승한은 연락처에서 태주를 찾았다. ‘형님, 오랜만에 연락드려요. 요즘 잘 지내시죠?’ 이런저런 안부 인사로 몇 줄 채우고 그 뒤부터 본격적으로 본론을 집어넣었다. ‘지우랑 결혼 준비하다가 조금 싸웠는데 혹시 시간 괜찮으시면 고민 상담 좀 해주실래요?’
승한이 말한 카페로 나가기 전 태주는 서랍 안에서 초록색 통장을 꺼내 재킷 안주머니에 넣었다. 매번 언제 줄까 고민하다가 지우랑 싸운 이후 만나질 못해 전해주기가 어려웠다. 적당히 승한을 통해 지우 소식 듣고 통장만 주려고 했는데 대화 주제가 예상과 전혀 달랐다. 아무런 대책도 없이 일단 퇴사부터 했다는 대목에서부터 열이 뻗쳤다. 그러면서도 뻔뻔하게 도와달라고 연락한 게 너무 괘씸했다. 당장 얼굴에 주먹부터 날리고 싶었는데 보아하니 지우 몰래 나온 것 같아 일단 참았다. 청산유수 같은 말을 한 귀로 듣고 전부 한 귀로 흘리며 ‘이 새끼를 어떻게 할까.’ 그 생각만 했다.
준비해 온 말이 끝나자 머쓱한지 승한은 연신 커피를 들이마셨다. 혹시 못 도와주겠다는 말이 나올까 봐 긴장한 티가 다 났다. 일단 장단은 맞춰줬다. 골똘히 고민하는 척 심각한 표정을 하고 커피잔만 바라보다가 통장을 꺼냈다. 이거 결혼할 때 보태서 쓰세요. 말이 떨어지자마자 승한의 눈이 커졌다. 잽싸게 통장을 열어보더니 헙 소리를 냈다. 이렇게까지 안 챙겨주셔도 되는데……. 가식적인 말투에 저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새로 자리 잡을 때까지 일할 곳 있어요?”
“아, 아뇨. 알아보고 있기는 한데 좀 어렵네요.”
“당분간이라도 저한테 일 배우는 건 어때요? 작은 사업이라 그렇게 부담스럽진 않은데.”
“아유, 저야 시켜만 주시면 감사하죠.”
“그럼 지우한테는 다른 회사 들어갔다고 하세요. 그래야 걱정 안 하니까. 정식 출근은 결혼식 끝나고 다음 주 어때요?”
마음이 반반이었다. 지우를 위해서라면 그깟 돈이고 일자리고 못 해줄 게 뭔가. 그런데도 저 밉상인 놈한테도 좋은 일을 하기가 싫었다. 어찌 됐든 결혼식이 더 급한 문제였으니 그때만큼은 지우를 위한 선택을 했다.
예정보다 한 달 늦긴 했지만, 다행히 결혼식은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지우는 원래 봐뒀던 웨딩드레스를 입었고, 웨딩홀과 일정이 맞아서 날짜 변경으로 생기는 어마어마한 위약금을 물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입구에 있는 ‘신부 윤지우’ 글자를 보자 옛날 생각이 났다. 성씨가 다르면 남매가 아니냐고 울던 지우를 달래느라 애썼는데. 대충 봐도 아는 사람이 많아서 식장 안까지는 안 들어가고 입구 근처에 서서 웨딩드레스 입은 뒷모습만 보고 뒤돌았다. 식이 다 끝나기 전 밖으로 나가려는데 지나가던 하객 몇몇이 태주를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행여 아는체라도 할까 봐 급히 웨딩홀 밖으로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6
언제 잠들었는지 눈 떠보니 벌써 아침이 다 됐다. 뻑뻑한 눈을 손바닥으로 몇 번 문지르고 상주 휴게실 문을 살짝 두드렸다. 지우야, 자? 답이 없길래 화장실이나 가려고 신발장 쪽으로 가려는데 입구에 지우 신발이 안 보였다. 다시 휴게실 문을 노크했다. 여전히 안에서 답이 없었다. 열어보니 반으로 접힌 이불만 있고 정작 쉬고 있어야 할 지우가 안 보였다. 급히 슬리퍼만 끼워 신고 장례식장 안을 돌아다녔다. 크게 이름을 부를 수도 없어 이리저리 둘러보느라 바빴다. 차마 여자 화장실 앞에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동동거리다가 포기하고 아예 밖으로 나가봤다.
겨울이라 해가 떴는데도 하늘은 창백한 푸른빛으로 가득했다. 찬 공기에 어깨가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고개를 내밀고 주변을 빙빙 돌다가 자판기 근처 벤치에 앉아있는 걸 발견했다. 급한 마음에 입고 있는 재킷을 벗고 달려갔다. 지우야,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어깨 위로 재킷을 둘러주려는데 지우가 먼저 손으로 밀어냈다. 괜찮아.
“지우야, 그러다 감기 걸려. 안으로 들어가자. 어?”
추우니 안쪽으로 들어가자고 팔을 끌어봐도 꿈쩍도 안 했다. 되려 이거 놓으라며 태주의 팔을 거칠게 내쳤다. 아이 달래듯 지우 앞에 무릎을 굽히고 올려다봤다. 그새 또 울었는지 눈가가 빨갰다. 지우는 후, 숨을 천천히 내쉬고 말라붙은 입술을 조금씩 움직였다.
“경찰이 그러더라. 절대 혼자 그런 게 아니래. 분명 공범이든 동업자든 있을 거라고.”
경찰 소리가 나오자 입이 바짝 타들어 갔다.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려 천천히 지우가 하는 말을 기다렸다.
“승한이 배에 있는 마약, 그거 혹시 오빠가 시킨 거야?”
뭐라고 말해야 네가 상처를 안 받을까. 눈을 마주칠 용기가 없어서 애먼 재킷만 만지작거리다 지우 무릎 위에 덮어줬다.
“걔, 네가 생각했던 것만큼 좋은 사람 아니었어.”
“말 돌리지 말고 제대로 대답해.”
“너 몰래 약이나 하던 애야. 너도 잘 모르는 일을 나라고 어떻게 속속들이 알겠어.”
굳이 이런 말을 꺼낼 생각은 없었다. 승한이와의 결혼도 결국 지우의 선택이니까. 그것을 탓하고 싶진 않았지만, 더 좋은 변명거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너 결혼 더 생각해보라고 했잖아.”
“나도 알아! 굳이 상기시켜주지 않아도 이젠 충분히 알겠다고, 걔가 좋은 사람 아니라는 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 사람과의 모든 기억이 부정당한 내 심정을 좀 생각해줘.
“나 너무 힘들어…….”
발인 날까지 옆에 있으려 했는데 지우가 먼저 그만 가보라고 등을 떠밀었다. 그 후로 한동안 연락이 없었다. 걱정됐는데 전화를 걸기가 어려웠다. 새벽마다 최근 통화목록 속 지우 이름만 보다가 잠들기 일쑤였다. 다시 만난 건 그로부터 일주일 뒤 태주 집으로 지우가 찾아온 날이었다. 현관문 앞에 무릎을 감싸 안고 앉아있는 지우를 보고 이상한 기분의 정체를 알았다. 너는 내 마음의 짐이자 날 잡아먹는 괴물이야. 화도 안 났다. 이 추운 날에 얼마나 있었는지 팔을 잡고 일으켜 세우는데 딱 봐도 온몸이 꽁꽁 언 상태였다. 아무 말 없이 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소파에 앉혀두고 커피포트에 물부터 올리려는데 지우는 그럴 여유도 없었다. 태주의 옷을 잡아 끌었다. 내가 생각을 좀 해봤는데 애초에 틀린 질문을 했더라고. 걔가 약을 했든 밀매를 했든 어차피 그런 건 승한이 몸이 다 알려준 사실이잖아. 중요한 건 걔가 약을 배달하다 죽었다는 거지.
“오빠가 죽였어?”
제법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태주는 아무 말 없이 지우만 바라봤다.
“네가 승한이 죽였냐고.”
바로 대답이 없자 이젠 조금 화난 듯한 목소리로 다그쳤다. 그제야 정신 차리고 대답했다.
“내가 안 죽였어.”
“정말로?”
“부검에도 그렇게 나왔잖아. 걔가 약을 얼마나…….”
“약하는 거 알고 있었지?”
이젠 정말 할 말이 없었다. 내가 어디까지 솔직해져도 되는 걸까.
“그래,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어. 걔가 너한테 해준 게 뭐가 있는데. 그런 놈은 죽어도 싸.”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넌 걔한테 배신감도 안 들어?”
“한때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야!”
그러니까 그 새끼한테 네 사랑은 너무 과분했다고. 순간 올라오는 감정을 제어하기 어려웠다. 하도 이를 앙다물어서 턱이 뻐근했다. 혓바닥 아래까지 말들로 가득 찼다. 네가 그렇게도 사랑하는 그 남편이라는 놈이 어떤 놈인지 알면 너는 또 상처받을까. 하지만 평생 지우 마음속에 아픈 손가락으로 남는 꼴을 볼 수가 없었다. 미련이고, 질투고, 이기심이었다.
“걔가 배신자였어. 하던 일이 틀어지니까 겁부터 먹고 돈만 챙겨서 이 나라 뜨려고 한 거야. 잘못하면 경찰한테 잡히고 너한테 마약 한 거 들키니까. 이게 네가 사랑한 그 남자의 본모습이야. 너 버리고 도망치다가 죽은 사람을 아직도 사랑해?”
와르르 쏟아진 말들은 제어가 안 됐다. 바닥에 떨어진 것들이 지우의 발목으로 모여 꽉 조였다. 더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결국, 지우가 먼저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7
주소를 어떻게 알았는지 지우가 사무실에 찾아왔다. 당황한 표정을 태주를 보고 아무렇지 않다는 듯 설명했다. 승한이 핸드폰 문자내역 보고 알았어. 서슴없이 들어오길래 일단 막았다. 우리 밖에서 이야기하자. 이곳은 마지노선이었다. 절대 보여줄 수 없는 곳. 안쪽에 일렬로 늘어진 테이블 위에는 포장된 약과 현금다발이 널브러진 상태라 수습도 어려웠다. 한참 문 앞에서 실랑이하다가 결국, 옆 방 창고에서 이야기 하는 걸로 지우가 한발 양보했다.
“아는 거 전부 다 말해. 내가 모르는 사실, 승한이 이야기, 오빠 하는 일 전부.”
소파에 앉자마자 꺼낸 말은 또 승한이었다. 태주에게는 지겨운 대화일 수 있어도 지우에겐 몹시 중요한 문제였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산 사람을 달달 볶아서 진실을 털어놓게끔 해야 했다. 그러니 유일하게 가장 많은 것을 알고 있는 태주를 무시할 수 없었다.
배수진 전략을 썼지만, 이 질문이 곧 지우의 무덤이 될 수도 있다. 지금 뒤로 너무 많이 물러나서 이미 허리까지 물이 찬 상태였다. 심장을 지나 곧 정수리 위까지 집어삼킬 만큼 물살이 너무 셌다. 겨우 바들바들 떠는 다리에 힘을 주고 섰다. 그게 지우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버티는 방식이니까. 태주가 또 상처받을 수 있다며 발을 뺄까 봐 미리 새치기했다. 오빠가 무슨 말을 해도 믿을게. 하나의 주문이었다. 널 신뢰할 테니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다 말해라. 태주가 그 주문에 걸리길 바랐다. 제발 걸려라, 걸려라, 걸려라……. 태주의 턱이 몇 번 움찔거렸다.
“결혼하기 전에 한번 찾아왔었어. 회사에서 잘렸다고.”
지우 몰래 만난 것, 태주 밑에서 일하게 된 것, 그걸 숨기기 위해 다른 회사에 취직했다고 거짓말한 것까지 승한과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나열했다. 결국, 거짓말이 거짓말을 낳은 거라 대부분 거짓말을 포장하기 위한 거짓말이 대부분이었다. 지금까지 출장 갔던 것 모두 약 팔러 간 것이었고, 이번 부산 출장 역시 부산에 있는 큰손한테 배달 가다가 쇼크사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중간중간 약이 없어지길래 따로 챙겨서 다른 곳에 파는 줄로만 알았지 실제로 약을 하는 줄은 몰랐다고 했다.
어느 정도 이야기가 끝나자 지우는 잠바 주머니에서 통장을 하나 꺼냈다. 그때 승한에게 줬던 것과 같은 통장이었다. 이거 다시 돌려줄게. 갈색 테이블 위에 놓인 초록색 통장이 이질적으로 보였다. 정말 하고 싶은 말은 이게 전부였는지 통장을 내려놓자마자 일어났다. 바로 나가려던 지우를 본능적으로 잡았다. 더 할 말 있어? 조금은 지친 얼굴로 지우가 물었다. 일단 잡고 본 거라 무슨 말을 해야 하나 머리를 굴렸다.
잠시만 기다려봐. 지우를 말로 다시 붙잡고 구석 캐비닛 쪽으로 갔다. 그 안에서 체크무늬 쇼핑백을 꺼냈다. 지우 손에 들려주는 데 느껴지는 무게감에 당황한 듯 보였다. 쇼핑백을 벌려보니 안쪽에는 신문지로 겹겹이 싸여있었다.
“걔가 너한테 전해달라고 했어.”
“이게 뭔데?”
“나중에 너한테 주겠다고 예전에 맡겨둔 돈이야.”
“언제는 나 같은 거 신경도 안 썼다며.”
사실 그런 돈은 없었다. 승한이 몰래 빼돌린 돈을 다시 가져온 게 전부라.
“그래도 최소한의 남편 노릇은 하고 싶었나 보지. 이건 승한이가 너한테 남긴 거니까 꼭 가져가.”
승한이 갑자기 그렇게 돼서 바로 주기도 그렇고, 너랑 승한이 문제로 싸우면서 더 전해주기 어려웠어. 지우가 듣기엔 완벽한 변명이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 지우도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믿고 싶었다. 그런데도 의심을 지울 수 없었던 이유는…
“가만 보면 오빠 참 승한이랑 닮았어.”
문이 큰 소리를 내고 닫혔다. 이젠 정말 지우를 영영 못 볼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한동안 또 지우 없는 일상을 보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어느덧 12월도 끝을 향해간다.
8
내일이면 크리스마스이브다.
9
지우가 그룹홈에 들어온 이후부터 시작된 ‘산타할아버지는 알고 계신대 프로젝트’는 생각보다 장기전이 됐다. 순수하고 순진한 지우는 초등학교 6학년이 될 때까지 산타가 있다고 믿었다. 그 환상을 한 번에 깨기가 어려워서 결국 다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지우만을 위한 산타 작전을 열심히 수행했다. 거기엔 제일 맏형인 태주도 예외 없이 참여했다. 크리스마스이브 저녁 아빠와 서점에 가서 지우가 갖고 싶어 하던 만화책 전권 세트를 사서 베란다에 숨겨놓았다.
늦은 저녁 지우가 몰래 태주 방에 찾아왔다. 오빠, 일어나봐. 소곤소곤하는 소리 때문에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귀가 간지러운 기분이었다. 눈을 비비며 일어나자 문을 빼꼼 열고 얼굴 반만 보이는 지우가 보였다. 작은 손가락을 문틈 사이로 넣어 손짓했다. 이리 나와봐. 오래된 나무문이라 조금만 움직여도 삐걱 소리가 조용한 집에 울렸다. 지우가 검지를 입술에 대고 쉿! 하며 태주의 손목을 잡아 트리가 있는 곳으로 데려갔다. 거실에는 후원단체에서 보내준 작은 트리가 있었다. 작은 전구들이 저마다 빨간색, 노란색, 초록색을 빛내며 반짝거렸다. 제일 위에 있는 별에는 누군가의 양말이 걸쳐있었다. 그 옆 낮은 탁자에는 지우가 직접 준비한 우유 한 컵과 작은 쿠키가 있었다.
지우는 트리 앞에 앉아 베란다 밖을 쳐다봤다. 행여나 밖으로 나가서 만화책이 들어 있는 상자를 들출까 봐 살짝 긴장했다. 힐끔힐끔 지우를 보는데 지우는 미동도 없이 창밖 하늘만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다행이다 싶어 태주도 따라서 옆에 앉아 조용히 하늘을 봤다. 조금 쌀쌀한 것 같아 소파에 있던 담요를 지우 등에 둘러줬다. 한참을 하늘만 보던 지우가 조곤조곤 말했다.
“여기서 자는 척하다가 산타 할아버지가 들어올 때 짠! 하고 놀래주자.”
바보. 네 선물 산 산타가 바로 옆에 있는데. 차마 말은 못 하고 그저 정전기로 올라온 지우의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었다. 쿠키 하나 먹을래? 그거 산타할아버지 거잖아. 괜찮아. 산타할아버지가 하나 정도는 괜찮다고 했어. 오빠 산타할아버지랑 대화도 해? 그럼. 둘이 한참 소곤소곤 떠들다가 지우가 먼저 잠들어버렸다. 그 사이 창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담요에 돌돌 싸맨 채로 살짝 안아 들고 지우 침대에 눕혀줬다. 방으로 들어가기 전 다시 베란다 쪽으로 나왔다. 상자와 신문지로 가려진 만화책 세트를 트리 밑에 가지런히 쌓아두고 미리 준비한 작은 카드를 위에 올려뒀다. 방으로 들어가기 전 지우가 반 먹다 남긴 쿠키를 입에 넣었다. 오도독하는 소리와 초콜릿 맛이 입 전체에 스며들었다.
크리스마스를 준비하면서 항상 설렜다. 이번에도 지우가 좋아해줄까. 산타할아버지 이야기를 하며 신나는 지우를 보고 싶어서 크리스마스가 기다려졌다. 누군가의 동심을 지켜주려고 시작한 일이 결국, 나에게 또 다른 동심을 심어줬다.
10
23일 저녁 11시 30분. 잠들기 전 침대에 누웠다가 다시 일어났다. 그동안 잊고 지내다가 다시 지우를 만나니 기억 어딘가에 멈춰있던 크리스마스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옛날이라 하더라도 7년 정도 지우를 위한 산타 행세하느라 그게 몸에 습관처럼 남았나 보다. 어릴 땐 장난감이나 좋아하던 만화책을 사주면 됐는데 이젠 그런 거로 지우를 웃게 해줄 수 없었다. 생각해보니 곧 있으면 이사 날짜라 더 마음이 쓰였다. 얘는 하필이면 이런 날에 이사 준비를 하냐. 침대 헤드에 기대앉아 가만히 핸드폰 속 시간만 바라봤다. 결국, 의자 위에 걸쳐놓은 외투를 집어 들었다. 몰랐는데 밖으로 나와보니 눈이 조금씩 오고 있었다. 출발하기 전 지우에게 문자를 남겼다. 오빠 지금 너희 집으로 가고 있어. 운전하는 내내 눈은 멈추지 않고 점점 더 많이 내렸다. 지우 집에 도착할 때쯤엔 벌써 24일로 넘어갔고 까만 아스팔트에는 눈 때문에 작은 흰색 반점들이 퍼진 것처럼 보였다.
문 앞까지 도착하고 핸드폰을 다시 봤다. 여전히 답장은 없었다. 통화 버튼을 누르려다 큰맘 먹고 키패드를 눌렀다. 혹시 바꿨을까 싶었는데 도어락은 잠금이 해제되었다며 경쾌한 소리를 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현관 앞에서부터 상자들로 난장판이었다. 몇몇 상자는 빈 상태였고 어떤 상자에는 승한의 물건이 가득했다. 그 사이를 조심스레 비집고 들어갔다. 지우야. 태주의 목소리가 텅 빈 집에 울렸다. 몇 번 더 불러봐도 답이 없었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아 자나 싶어 조용히 안쪽 방문을 살짝 열어봤다.
짙은 회색의 이불이 작게 솟아있었다. 침대 헤드 쪽으로 검은색 머리카락이 삐죽 튀어나왔고 이불의 일정하게 오르락내리락했다. 지우야. 작게 이름을 불렀다.
“그냥 가.”
다 갈라진 목소리로 지우가 대답했다. 그 목소리를 듣고 어떻게 그냥 갈 수 있나. 아까보다 더 문을 열고 몸을 반쯤 넣었다. 지금 밖에 눈 와.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너 어렸을 때 눈 구경하는 거 좋아했잖아. 옛날이야기를 해서 그런가 이불을 걷고 일어나 더 날카로운 목소리로 답했다.
“그냥 가라고!”
여기서 물러나고 싶지 않았다. 기어코 침대까지 걸어와 지우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지우야. 오빠 봐봐. 꽉 주먹 쥔 손을 크게 감쌌다. 그것마저도 싫은지 지우는 바로 손을 쳐냈다. 나가. 단호했다. 지우야. 나가라는 말 안 들려? 당장 뺨을 때릴 기세로 손을 들어도 태주는 가만히 있었다. 내가 다 미안해.
“널 속였던 건 미안해. 그렇지만 네가 사실을 알았을 때 상처받을까 봐, 그게 무서워서 말 못 한 거야.”
“그러니까 그 이유가 뭐냐고. 내가 상처를 받든 말든 네가 무슨 자격으로 걱정을 하는데.”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몇 년 만에 만나니까 오빠 노릇이라도 하고 싶었냐?”
“지우야.”
“나가자마자 먼저 연락 끊은 건 너야.”
지우의 말에 틀린 것이 없었다. 먼저 도망치듯 떠난 건 태주고 어린 지우가 받아들이기엔 너무 갑작스러웠다. 그동안 지우는 화가 많이 났다. 비록 친오빠는 아니지만, 친오빠처럼 챙겨줘서 좋았고 그렇기에 애정이 있었고, 나중에라도 다시 만나고 싶었던 것뿐인데…. 왜 이렇게 된 걸까…….
“우리 서로 거짓말하지 않기로 약속했잖아.”
방금까지 화내던 목소리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몸이 떨려서 그런지 울기 직전이라 그런지 불안정한 목소리였다.
“그런 건 이제 다 까먹었어?”
그걸 어떻게 까먹겠어.
일부러 피해있던 시선을 돌리자 아래로 늘어진 머리카락이 보였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지우 옆에 앉았다. 매트리스가 지우가 앉았을 때보다 조금 더 낮게 가라앉았다. 고개를 푹 숙인 지우에게 다가갔다.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그대로였다. 울음을 참느라 머리카락 사이에 숨는 것도, 한 손에 들어오는 작은 어깨도, 슬플 때면 태주의 어깨에 이마를 갖다 붙이는 것도. 그땐 머리가 길어서 이렇게 안아주면 머리카락이 만져졌는데. 떠오른 기억들이 전부 오래돼서 같은 상황이지만 낯설었다. 태주가 어색하게 등을 토닥이는 사이 지우는 깊게 숨을 내쉬고 들이마셨다. 마른 등이 위로 솟았다 꺼지기를 반복했다.
한번 크게 숨을 마시면 태주의 향수 냄새가 코를 간지럽혔다. 자세는 익숙해도 사람은 낯설었다. 이름도 모르는 향수와 훨씬 커진 키, 하다못해 등을 토닥이는 손에서 느껴지는 무게감도 달랐다. 다시 숨을 내쉬면 태주에 대한 생각은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그 자리에 승한이 남았다. 당장 만져지는 이 이불, 앉아있는 침대마저도 승한이 직접 산 물건이었다. 네가 날 버리고 잘 살 수 있을 것 같아? 방 전체가 살아 움직이는 기분이었다. 눈을 꽉 감았다. 마지막으로, 정말 딱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고 끝내자.
“나한테 더 숨기는 거 없지.”
태주는 차라리 승한이 죽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응. 앞으로도 없어.”
영원히 들키지 않을 완벽한 거짓말이다. 제일 중요한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이미 죽어버렸으니. 새하얀 거짓말은 눈덩이처럼 커지고 커져 곧 마을을 집어삼킬 기세였다. 그리고 미련과 질투, 이기심이 똘똘 뭉쳐 마치 돌덩어리처럼 그 안에 콕 박혔다. 누구 하나가 맞으면 죽을 것 같은 그런 눈덩이. 이미 그 아래에 깔린 승한이 신경 쓰였지만 괜찮았다. 눈이란 게 쌓이고 쌓이다 보면 하얀색으로 모든 걸 덮어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