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주어진 낭만은 죽음뿐이었음을.
@성(6098640a)
“금방 올게.”
금방은 개뿔. 정태주가 나를 또 버렸어. 다른 연인들 간에 있을 법한 한갓 실랑이 따위가 아니었다. 아주 오랜만에 남들같이 일상적인 시간이나 가져보려고 마련한 자리에서 태주는 체육관에서 온 급한 연락에 입에 넣지도 않은 밥도 내팽개치고 체육관으로 뛰어갔다. 오늘은 그들의 암묵적인 1주년, 뭐 그런 날이었다.
지우와 태주는 언젠가부터 이렇다 할 시작도 없이, 누구 하나 사귀자는 말도 없이 이런 관계가 되어있었다. 두 사람은 항상 여유라는 단어가 존재하지도 않는 듯이 각자 조직과 경찰의 일에 매달렸다. 신분도, 시간도 평범을 허락하지 않은 덕분에 그들 사이에는 거리낌 없는 연락 한 통이 누구보다 어려웠고, 남들의 시선을 피해 만나야 했으며, 그마저도 짧디짧았다. 그러다 며칠 전, 문득 이런 사이가 된 지 대략 1년쯤 되었겠거니 하고 자각했다. 그래서 이번엔 방해받지 않는 곳에서 다른 사람들처럼 밥 먹고, 술이나 한잔하자, 그런 약속을 했다. 태주는 처리할 일을 몰아서 시간을 빼겠다고 했고, 지우는 오랜만에 회식을 하는 게 어떠냐는 팀원들의 제안을 거절하고 남들의 눈에 띄지 않게 정태주의 집으로 향했다.
그의 오피스텔에 도착했을 때 태주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를 기다리는 동안, 거지 같은 제 요리 실력을 잘 알고 있던 지우는 식사를 직접 차리는 대신 전부터 시간을 들여 검색해두었던 음식점에서 배달을 시켰고, 태주가 오는 시간에 딱 맞춰 세팅을 마칠 수 있었다. 옅은 미소를 머금고 들어오는 태주를 부드럽게 풀어진 얼굴로 맞았다. 바라지 않고 살았다고 생각했지만 나름대로 이 평화가 그리웠는지 묘하게 들뜬 느낌이었다. 오늘이라면 낭만 같은 시답잖은 걸 잠시 탐내보아도 될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그런 윤지우의 기분에 정태주는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순식간에 가라앉은 얼굴로 얼음물을 부어버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나갔다.
이 허탈한 광경에 멍을 때리다가 시켜놓은 음식이 아까워 식다 못해 딱딱하게 굳어버린 초밥을 입에 욱여넣었다. 기분이 더러워서 그런가. 맛도 더럽게 없네. 돈 아깝게, 시발. 결국 다 먹지도 못하고 음식물 쓰레기통에 쏟아버린 지우는 식탁 위를 치운 뒤 발코니로 향하는 창문을 열고 나갔다. 태주의 침실에서 챙겨 나온 담배를 입에 물고 지포 라이터를 튕겨 불을 붙였다. 난간에 팔을 기대고 탁한 연기를 깊게 빨아들이자 옴폭 패인 볼에 서늘한 바람이 스쳤다. 후우-. 낭만. 지랄하고 있네. 우리 같은 새끼들이 어떻게 낭만을 찾아. 내 주제에 무슨.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연기 속에 자조가 섞였다.
띵-.
경쾌한 알림음이 울렸다. 재떨이에 어느새 짧아진 꽁초를 짓이기며 느릿하게 핸드폰을 빼 들었다. 발신자, 정태주 이사. MMS. 간결한 물음과 답변만이 즐비한 문자 내역을 떠올린 지우가 의아함이 묻어나오는 손가락으로 화면을 눌렀다. 작은 화면이 전환되며 나타난 것은 시체가 즐비한 체육관 내부 사진. 뻣뻣하게 굳은 손으로 화면을 넘기자 목에 칼이 들이밀어진 정태주의 사진이 떠올랐다. 태주의 얼굴 옆에 흐릿하게 찍힌 익숙한 얼굴과 함께 아래에 새로 생성된 말풍선이 보였다.
[오랜만이네, 윤지우.]
급습. 이사님, 정태주.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오피스텔에서 뛰쳐나갔다. 눈이 내리겠다는 예보가 있을 정도로 추운 날씨에 가죽 자켓 하나만을 걸치고 차에 올라탔다. 체육관이 있는 부둣가에 도착했을 때는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미 그 패거리는 자리를 뜬 지 오래인 듯했다. 어울리지 않게 청량한 파도 소리를 뒤로하고 철문을 천천히 밀었다. 끼익,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따뜻하고 비릿한 냄새가 문틈 사이를 비집고 흘러나왔다. 역겨움을 느낄 새도 없이 두 눈이 체육관 내부를 다급하게 훑었다. 진창이 된 바닥과는 달리 환하게 켜진 형광등 아래로 낮게 선 인영이 보였다. 정태주였다.
무릎을 꿇고 앉은 정태주는 참 깔끔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하얀 와이셔츠에 목을 꽉 조여 맨 넥타이, 그 위를 감싼 청회색 빛의 베스트와 셋업을 이루는 바지. 누가 보아도 갖춰 입고 출근한 일반적인 비즈니스맨의 차림이었다. 몇 가지만 빼고. 바닥에 굴렀는지 먼지와 핏물로 얼룩진 옷가지, 그리고 몸통 중앙에 자리한 쇠붙이. 태주의 명치 한가운데를 뚫고 나온 긴 칼날에서 피가 뚝뚝 흘렀다. 이미 발치에는 붉은 액체가 흥건했다. 그는 아프지도 않은지 고개만 푹 숙이고 미동도 없이 앉아있었다. 하하, 헛웃음이 흘렀다.
“아, 이사님 진짜 아프겠다. 우리 병원부터 가요.”
부축하려고 뻗은 손이 차마 닿지 못하고 팔뚝 언저리에서 후들후들 떨렸다. 작은 소리도 탕탕 울려 퍼지는 체육관 안이 유난히도 적막했다. 이사님, 왜 대답이 없어요. 됐다고 해야지.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신경 쓰지 말고 네 일이나 하라고 날 세워야지. 나한테 상처 줘야 하잖아요. 맨날 하던 것처럼 내 기분 좆 같이 만들어야지. 선배. 정태주. 대답해 봐. 가쁘게 차오르는 숨소리 하나만 빠듯하게 내던져졌다. 까맣게 내려앉은 문장들이 두서없이 쏟아졌다. 왜. 싸우느라 힘들어서 나 빡치게 할 기운도 없어요? 많이 약해졌네, 정태주. 고작 이것밖에 안 되는 줄 몰랐어. 이런 등신한테 내가 지고 살았다는 거야, 지금? 흐으, 하, 하하, 하으. 길을 잃고 흔들리던 목소리 뒤로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소리가 제 의지와 상관없이 줄줄 흘렀다. 아직도 어깨에 닿지 못한 손이 어정쩡하게 그 주변을 배회했고,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관자놀이가 지끈거리며 눈앞이 뿌옇게 차올랐다. 따끔거리는 목구멍에서는 겨우 쥐어짠 목소리마저 툭툭 꺾여 나왔다.
“뭐해요, 이사님. 빨리 일어나요. 당신이 금방 온다는 약속 안 지켜서 내가 왔는데, 나 계속 이렇게 세워둘 거예요? 같이 병원 좀 가자고. 우리 아직 밥도 못 먹었잖아, 응? 나 배고파요. 그러니까 일어나, 정태주. 제발.”
콱-.
잘게 떨리던 다리가 일순간 꺾이고, 축축하게 젖은 바닥에 무릎이 아프게 내리꽂혔다. 그와 동시에 바닥을 짚은 손에는 질척이는 액체가 한껏 묻어 딸려 올라오나 싶더니 저들끼리 뭉쳐 다시 바닥으로 추락했다. 파동조차 일지 않을 정도로 끈적이는 액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상체를 앞으로 숙여 두 손으로 웅덩이를 짚고 간신히 무릎걸음을 옮겼다. 찰박, 즈윽, 찰박, 즈윽. 땅과 액체, 천이 마찰하는 소리가 소름 끼치게 귀를 울렸다. 시야가 희끗했다. 벌겋게 달아올라 눅눅하게 젖은 볼이 점차 바짝바짝 말라왔다.
너는 시발, 아무것도 몰라.
한 토막의 기억이 너무 좆 같아서 다시 떠올리고 싶지도 않았던 목소리가 웅웅거렸다. 알아. 안다고. 이를 악물고 모래주머니라도 매단 듯 묵직한 팔다리를 움직였다.
네가 뭘 알아, 쌍년아.
알아. 시발, 너 따위 개새끼가 짖지 않아도 알고 있다고. 얼굴보다 뒤통수가 더 잘 보일 만큼 깊게 처박힌 태주의 머리가 코앞이었다. 거친 바닥에 쓸리고 찍힌 무릎이 아픈 것도 몰랐다. 핏물에 절은 손을 대충 허벅지에 닦아내고 온기가 떨어져 나가 버석한 양 볼을 감싸 쥐어 고개를 들어올렸다. 다 감기지 못하고 반쯤 뜨여있는 눈과 습기가 찬 눈이 마주쳤다.
“알아. 나도 알아. 이사님은, 정태주는 이미 죽었다는 거. 내가 도착했을 때부터, 첫마디를 건넸을 때부터 죽어있었다는 걸, 나도 알고 있다고.”
푸스스, 입술 사이로 차가운 숨이 터져 나왔다. 텅 비어버린 눈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볼에 동그랗게 튄 핏방울을 엄지손가락으로 연신 문질러댔다. 그렇게 많이 보아왔던 핏자국이 이 순간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보기 싫었다. 그 절박한 손길에 얼룩이 닦이는가 싶더니 진작에 말라 굳어버린 빨간 테두리와 밀린 자국이 그대로 남아버렸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네, 그쵸.”
슬슬 새어 나오는 숨을 갈무리할 그 작은 의지조차 남지 않았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 차갑게 식은 얼굴만 바라보던 지우가 팔을 들어 가늘게 열린 눈 위에 손바닥을 올렸다. 손바닥 아래로 눈꺼풀이 감기는 것을 느끼며 그대로 입술을 겹쳤다. 아무런 움직임이 돌아오지 않아도, 비릿한 혈향만이 스며들어도 고집스럽게 입술을 물었다. 허옇게 질린 얼굴에 제 체온이라도 나눠주겠다는 듯 꽤나 오랫동안 맞대고 있었다. 입술을 옮겨서 감긴 눈과 생채기가 난 콧등, 그리고 다시 입술까지 차례로 입을 맞춘 지우가 그의 얼굴이 떨어지지 않게 제 어깨 위에 얹었다. 잔뜩 헝클어진 뒤통수를 몇 번 쓸어내린 지우는 힘없이 늘어뜨린 태주의 두 팔과 허리 사이에 제 팔을 집어넣고 너른 등 뒤로 손을 옮겼다.
이사님. 선배. 기다려요. 같이 가요. 난 모든 걸 잃었는데, 남은 건 당신뿐이었는데. 여기에 당신까지 두고 살아갈 자신이 없어. 나한테는 그럴 용기가 없어요. 그러니까 같이 가. 잠깐만 기다려 줘요. 내가 달려가서 당신 손 붙잡고 걸을 수 있도록 조금만 기다려, 정태주.
벌어진 무릎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앉아서 태주의 등허리께에 꽂힌 무식하게도 투박한 손잡이를 쥐었다. 망설임은 없었다. 눈을 감고 손에 쥔 모든 것을 자신에게로 끌어당겼다. 말은커녕 신음도 나오지 않을 정도의 극심한 고통에 가슴이 화끈거리고, 당장이라도 멈추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지만, 지우는 그에 굴하지 않고 있는 힘껏 태주를 품에 안았다. 정태주와 같은 자리에 같은 깊이의 같은 상흔이 남아, 같은 끝을 맞이할 수 있도록. 태주와 상체가 빈틈없이 완전히 밀착하고 나서야 단단한 어깨 위에 제 턱을 얹고 밭은 숨을 내쉬었다. 옷자락이 축축하게 젖어오는 것을 느끼며 점점 감각이 사라지는 손에 억지로 힘을 주고 움직였다. 태주의 손에 겹쳐 올리고 집요하게 깍지를 끼는 일련의 과정이 몽롱한 꿈결 같았다. 눈이 가물하게 내려앉았다.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생각했다. 아, 우리에게도 낭만이라는 게 있긴 할까, 있다면 대체 어떤 형태일까, 항상 궁금했는데.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같은 죽음을 맞는다니. 내 생에 다시는 없을 낭만적인 일이네.
아아, 이제서야 알았다.
우리에게 주어진 낭만은 죽음뿐이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