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唯有
​@예외(only_you_law)

* 기존의 레인버스 세계관과 다른 점이 있으니 꼭 읽어주세요.

- 레이너 : 우리가 흔히 아는 레이버스 세계관 속 인물. 비오는 날 아무 소리를 듣지 못 하며 운명의 상대의 목소리만 들을 수 있다.

- 과거 모종의 이유로 레이저들이 몰살당하고 현재는 ‘돌연변이’로만 만날 수 있다.

- 일반인은 레이너가 아닌 사람들이며 그들은 운명의 상대를 알아볼 수 없다.

- 윤지우 : 레이너 / 정태주 : 일반인

 

 

 

 

 

 

 

 

 

 

소설책에서 이런 단어들을 본 적이 있다. 솨아아.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방울이 내는 소리라 했다. 찰방찰방. 동동 거리는 발걸음의 노랫소리라 했다. 토독토독. 빗방울이 머리에 닿고, 손등에 닿고, 심장에 닿으며 마음을 적시는 소리라 했다. 

 

비 내리는 날.

그 어떤 고성능 귀마개보다도 효과가 훨씬 좋았고, 고요를 표현하라면 그 자리에서 빼곡히 열 장도 족히 써내려갈 수 있었다.

 

그게 비 내리는 날이 나에게 갖는 의미다.

 

귀에는 이어폰이 깊게 박힌 채 책상에 엎드리면 이상하게 그날따라 창밖으로 자꾸만 시선이 꽂혔다. 타닥타닥? 첨벙첨벙? 저 비가 내는 소리는 뭘까. 무섭도록 바닥에 떨어지는 저 빗방울은 날카로울까 아님 상쾌하고도 통통 튀고 있을까.

몇 년만에 다시 갖게된 비에 대한 관심은 내 머리속을 헤집어 놓기에 충분했다. 순수하고도 호기심 넘쳤던 어릴 때 이후로 비 오는날, 혹은 비와 관련된 모든 소리엔 궁금증을 갖지 않았다.

궁금증을 가질 수록 해결되기는 커녕 내 속만 타들어가기 일쑤였으니 비 오늘 날은 일부러 더 무심하게 굴었다. 그리고 오늘도 그랬어야 했다. 멍하니 쳐다본 하늘은 너무 어둡고 그늘져서 이젠 내 시야까지 뺏어가는 느낌이었고 귀을 막고 있는 이어폰을 내던지듯 빼내어도 지속되는 고요는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헛된 꿈, 허황된 목표, 망상. 내가 빗소리를 듣고자 하는 행동에 가장 잘 어울리는 단어들이었다. 고작, 빗소리를 듣고자 하는 행동에.

 

 

 

 

 

재수도 없지. 내 손 안에서 덜컥 거리는 우산은 보기좋게 찌그러져 있었다. 다 펴지지 않는 우산을 억지로 쓰고 가려 해도 부러진 철사에 긁혀 찢긴 천이 훤히 보였다.

결국 현관에 있는 쓰레기통에 우산을 던져버리고 후드집업 모자를 뒤집어 썼다. 책이 젖는 거야 상관없었지만 가방을 뒤집어 쓰기엔 귀찮아서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잔디 색이 진해진 운동장 위로 발을 옮겼다.

제일 먼저 젖은 곳은 신발. 어차피 젖을 거긴 했지만 물웅덩이에까지 발이 담궈진 건 짜증이 났다. 괜히 한 번 허공에 신발을 툭툭 차며 승질을 부렸다 체념한 채 천천히 발을 옮기다 보면 불쑥 내 옆에 인기척이 드리웠다.

 

“쓰고 가.”

 

어라. 나 방금 목소리가 들렸어. 분명히 한 사람의 목소리를 내가 들었다고.

내 귀에 들린 목소리 하나로 인해 내 손에 쥐어진 우산과 저 앞으로 뛰어가는 사람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내 간절함이 만들어낸 환청일까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그러기엔 타이밍이 너무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다.

종종 다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 걸까 상상하고 추측해본 적은 있다. 정말 필요할 때엔 입 모양을 보고 추측하기 일쑤였다. 그래도 진짜 목소리가 들린 건, 이렇게나 선명하게 내 귀에 꽂힌 건 처음이었다. 아니 애초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우산을 들고 천천히 걸어봤지만 결국 교문 앞에서 주저앉아 펑펑 울었다. 우산을 위로 들고 있을 힘이 차마 없어 바닥쪽을 향한진 오래였지만 그래도 우산 손잡이는 놓지 않고 꽉 쥔 채 눈물을 쏟았다. 그걸 놓으면 왠지 내가 본 모든 게 신기루일까봐 겁이 났던 거 같다. 그리고 당연스레 옷이 흠뻑 젖어갔지만 어째 찝찝하이라곤 하나도 들지 않았다.

 

 

 

 

 

 

 

 

 

 

무거운 눈꺼풀을 박박 비비며 터덜터덜 발을 이끌었다. 지각 직전에 등교해 조용히 반 구석에 엎드려있던 내가 7시 등교라니. 지나가던 개도 비웃을 소리였다.

게다가 이틀 연속 비가 오는 탓에 나는 여전히 쌩쌩 달려가는 차들의 소리도, 시끄럽게 날아가는 비행기도, 그 어떤 소리도 들을 수 없는 상태로 걸어야 했다.

 

학교에 도착해서 아무도 없는 복도를 걷다보니 괜히 기분이 이상했다. 지금 내가 겪는 이 조용함은 그저 당연한 거 같아서. 많은 사람들 속에서 나 혼자 이상함을 겪는 게 아니라, 그냥 평범하고 또 평범한 정적 같아서. 그래서 괜히 천천히 걸어보기도 했다.

내 교실이 위치한 2층이 아닌 4층까지 올라와 한 반 앞의 문고리에 우산을 걸어놓고야 옅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얼굴을 마주치지 않고, 남들에게 들키지도 않고 자연스럽게 돌려줬음에 성공했기에 나온 안도였다.

하지만 안도하기엔 너무 일렀던 것일까. 뒤를 돌자 가만히 서있는 사람에, 마치 하면 안 될 짓을 하다 들킨 어린이아처럼 화들짝 놀라 멍하니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우산의 주인 3학년 2반 정태주. 우연히도 나는 선배를 알았다.

 

뛰어가듯 걸어와 반에 도착해 내 자리에 앉았음에도 도저히 이 심장은 진정할 생각이 없어보였다. 설레고 벅차고 당혹스러운 감정들이 심장을 뛰게 만들고 눈에는 눈물이 고이게 만들어댔다.

당연히 이 눈물을 만들어낸 장본인은 조금 전만 해도 내 앞에 서있던 선배 탓이었다. 자신을 어떻게 아냐는 질문 따위도 내뱉지 않고 끝까지 빤히 쳐다보던 선배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거 역시 가만히 서있는 것 뿐이었다.

 

“감사했습니다. 잘 썼어요. 그 완전히 말려서 잘 말려서 잘 접어뒀어요…!”

 

결국 어색한 인사라도 먼제 건네자 말을 꺼냈는데 나도 모르게 횡설수설하게 말한 탓에 입술을 깨물며 깊이 후회해야 했다. 게다가 꾸준히 가만히 쳐다보는 선배 탓에 더 긴장해야 했고.

 

“… 그래, 고맙다.”

 

당황한 탓에 이상한 소리를 내뱉을 뻔 했다. 다행히도 그건 참아냈지만 숙였던 고개를 티 나게 당황하며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그리고… 환청이 아니었다. 내가 어제 들은 건 내 상상이 만들어낸 환청이 아니라, 진짜로 들을 수 있었던 목소리였던 것이다. 결국 당황보다 벅참 때문에 눈에 눈물이 고일 위기였고 급하게 목례를 하고 자리를 빠져 나와 반에 온 것이다. 

여기서 울 순 없어. 스스로에게 마치 주문을 걸 듯 되내이고 또 되내이고 나서야 눈물을 꾹꾹 참아낼 수 있었다. 귀를 막으나 막지 않으나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건 똑같았으나 이상한 불안감과 당혹스러움에 귀를 막지 않고서는 버틸 수가 없어서 두 손으로 귀를 꾹 막고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며 가쁜 숨도 같이 진정시켜 보았다.

그 선배를 알게된 건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다. 그날따라 이어폰을 두고 온 탓에 귀로 들어오는 소리들을 하나도 거르지 못 하고 저부 들어야 했다. 덕분에 세상이 이렇게나 시끄러웠던 것인지 다시금 깨달으며 한껏 미간을 찌푸린 채 걷고 있는데 선생님들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더 귀에 꽂혔다. 2반의 정태주, 그리고 그 중에서도 유독 잘 들렸던 이름. 그 때는 이유를 찾지 못 했는데 아무래도 이러려고 그랬나보다.

게다가 한 번이면 모를까, 예전에 복도에서 태주야. 하고 부르던 선생님의 말과 유난히도 잘 보인 그 선배의 모습. 

 

운명의 상대, 절대 찾을 수 없을 줄 알았던 그 운명이 내 앞으로 성큼 다가오고 나니 어째 이 모든 것이 흘러져있던 일인 것만 같아 어딘가 허무하기도 했다. 이렇게나 가까이 있는데 못 찾았다는 것에 대한 허무보다는 진짜 내 인생이 정해진대로 흘러가는 것만 같고 내게 존재하는 우연이라는 말은 다 볼품없이 느껴졌다. 운명의 상대, 그래도 찾으면 마냥 행복할 줄만 알았는데 오히려 절망감만 더 커진 거 같다.

 

 

 

 

 

 

 

 

 

 

비가 오는 데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정해진 운명에 대한 허무함을 둘째치고 그래도 들릴 수 있는 소리가 있다는 건 내게 한 희망을 심어주게 했다. 물론 그 날 이후로 몇 주가 지나도록 마주친 적은 없지만 그래도 운명의 상대라는데 오늘같은 날은 마주칠만 하지 않을까. 비오는 날이면 헛된 기대를 품는 건 일상이었는데 이 정도 바람을 갖는 건 일도 아니었다. 

 

“안녕하세요.”

 

이뤘다. 이 선배가 진짜 내 운명의 상대긴 한가보다. 이렇게 바로 마주치는 걸 보니.

 

“… 안녕.”

 

오롯이 선배의 말만 들리는 세상. 내 인사를 받아주는 선배를 보자니 괜히 기쁜 마음이 들었다. 나도 이제 비 오는 날이면 들을 수 있는 소리가 생겼어. 또렷하고 정확한 목소리가 들려.

 

비 오는 날이면 선배를 찾아다니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마침 시작된 장마에 선배를 찾아다니느라 바빴고 이젠 그런 것들이 신나는 지경에 이르렀따. 게다가 비가 오지 않는 순간에도 선배 주변을 서성이며 선배의 목소리를 귀 속에 담는 건 이젠 일상이고 그게 내 학교 생활의 전부였다.

 

“윤지우? 글쎄 그만 찾아왔으면 좋겠는데. 난 걔 별로야.”

 

그 소리가 들리기 전까진. 왜 하필 오늘 비가 와서 그 목소리가 더 잘 들린 건지.

저런 소리를 듣는 거 자체로 힘든 건 아니었다. 질리도록 들었던 말이고 심한 말을 들은 것도 여러번인데 이건 상황이 달랐다. 운명의 상대라며. 운명의 상대라고 정해준 하늘을 원망하고 싶었다. 의미 없는 짓인걸 너무 일찍 깨달아 멈춰버린 하늘을 원망하는 짓을 정태주 선배 때문에 또 하고 있다. 운명의 상대라고 그렇게 눈에 잘 띠게 하고 선배의 목소리만 들리게 해놓은 거면서 그 목소리로 내 욕을 하는 걸 듣게 하는 건 내게 너무 가혹했다. 여태 내게 내린 모든 행동 중에 가장 가혹하고 잔인한 행동이었다.

 

너무 오랜만에 제대로 된 상처를 입은 마음은 그 자리를 피해버리는 걸 선택했고 선배를 나도 찾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그 다짐을 한 지 고작 하루 지났는데 이번엔 또 운명의 상대라고 붙여놓은 건가. 아침부터 마주친 선배 얼굴에 가벼운 목례만 하고 지나쳤다. 인사를 하고 무시당하는 것도 두려웠고 선배의 목소리를 또 듣는 것도 두려웠지만 그렇다고 선배를 무시하는 건 내가 절대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내게 선배는 목소리가 들린다는 소식 하나로 설렘을 주고 기쁨을 주는 사람이었기에 내가 선배에게 특별한 감정은 어쩔 수 없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아무것도 없던 내 삶에 기다림을 주기도 하며 이리저리 선배를 찾아다닌 그 시간 자체가, 그 시간 전부가 내게는 소중함이고 과장하자면 사랑이라 칭할 수 있을 정도였다. 선배만이 내 고요를 깨주었고 온통 무채색이었던 내 삶에 오직 선배만이 활기와 생기를 넣어줄 수 있는 존재였기에 많은 것들을 버텨왔던 내가 훅하고 무너져 버릴 정도였다.

 

아, 꼭 이런 날 우산에 문제가 생기더라. 유독 동요가 심했던 내게 또 재수없게도 우산이 문제였다. 고장난 건 아니었고, 반에 두고온 거였는데 가지러 가기엔 귀찮았기에 그때처럼 다시 후드를 뒤집어 쓰고 빗속을 거닐었다. 그리고 그때처럼 다시 한번 내 앞에 선배가 나타났다.

 

“쓰고 다니라니까.”

 

내 손에 우산을 쥐어준 선배는 이번에는 뛰어가지 않았다. 같은 우산 아래 서서 내 눈을 마주치고 말을 해왔다. 이젠 차라리 정적이 좋을 정도로 선배 목소리가 들리는 게 싫었다. 아니 싫어지고 싶었다는 말이 더 정확하려나.

 

“쓰고 가. 돌려주는 건 안 해도 돼.”

“… 왜 안 돌려줘도 되는 건데요?”

 

떼를 쓴다고 해도 좋았다. 어이없다고 비웃어도 좋았다. 그래도 장마기간이 지속된 한 달동안 그 꿉꿉함 속에서도 함께한 시간이 가득했고 대화도 나름 많이 했다고 생각했는데 선배에겐 평범한 일이었는데 나만 신나고 나만 의미가 가득했던 거 같아 속상한 마음에 툭하고 튀어나왔던 것이다.

 

“선배 나 싫어요?”

“…”

“나 안 보고 싶어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 듯 아무말 없는 선배는 나를 자꾸만 안달나게 만들었다.

 

“보고싶어. 근데,”

“아니요. 하지마요.”

 

보고싶다며 말한 뒤 다른 말을 붙이려는 선배를 내가 강제로 막았다. 차라리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아서 내가 먼저 도망쳤다. 선배가 나를 보고싶어 한다면, 그 어떤 이유가 있더라도 나는 뭐든 할 거고 어떻게든 목소리를 계속 듣고 싶었다. 난 그 하나면 됐다. 선배의 목소리만 들을 수 있다면 뭐든 괜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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