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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이름을 유언으로 삼고
@열(seainyeol)

01

윤지우가 죽었다. 

천둥번개가 치던 날 동훈 형님의 유골함이 부서졌고 너는 그 덕에 정신을 차린 후 한참을 울었고 아끼던 도강재는 얼굴이 망가졌다.

 

"다 울었으면 이제 가라."

"멈추기엔 이미 늦었습니다."

최무진이 복수를 지시했지만 나는 너를 보내고 싶었다. 너를 보면 내가 보였고 도강재가 보여서 선택지가 없어도 이 선택은 하지 않기를 바랐다. 너를 보면 동훈 형님이 보였고 과거의 우리가 보여서 나는 너를 완전히 미워할 수도 아낄 수도 없었다.

 

 

02

윤지우가 오혜진이 된 후 네가 살 집을 계약하고 가구를 들였다.  

너는 아무것도 모른 채 나와 최무진에게 "고맙습니다"하고 인사했다. 나는 너를 아낄 수는 없어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자신을 설득했다. 너는 말 그대로 아무것도 모르는 열일곱이었고 나는 너에 비하면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린 사람이었다. 복수를 할 수 있을 만큼 클 때까지 널 돌보라는 최무진의 지시로 나는 너를 가르치고 네 삶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스파링을 할 때 너는 꼭 모든 걸 거는 눈을 했다. 나는 가끔 눈을 피했지만 그렇다고 손을 멈추지는 않았다. 너는 내 것을 다 가져가려는 듯 배웠다. 너는 나를 죽여 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 생각이 들자 안 된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네 손에 죽는 것이 내게 속죄라는 생각을 하면 나는 동천파를 배신하는 꼴이 된다.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선배 지금 집중 안 하고 있죠."

네 목소리에 상념이 깨지면 그제야 너를 똑바로 바라봤다. 

"죽이는 법을 배우는 건 결국 살아남으려고야. 복수도 결국 살아야 하는 거다"

나는 말을 돌렸다. 나는 네가 살아남기를 바랐다.

너를 지켜보다가 네가 할 수 있는 요리가 3분 짜장과 햇반에 김을 뜯어놓는 것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아버렸다. 여기까지가 지시사항인지는 모르겠으나, 요리를 가르치는 것보다 하는 게 빠르겠다. 판단이 서자 네 집에서 요리를 시작했다. 

너는 미역국을 싫어하고 된장찌개를 좋아했다. 

"선배는 안 바빠요? 이사씩이나 되는 사람이. 제가 차려 먹을 수 있어요."

말은 이렇게 하면서 콩나물무침보다 소시지를 더 열심히 먹는 너를 지켜봤다. 사실 너 혼자 밥을 먹기엔 집이 너무 넓다고 생각했던 것도 같다.

"너 챙기는 것도 내 일이야."

너는 내 대답에 부루퉁한 표정으로 젓가락을 잠시 멈췄다.

 

"일이라서 죄송하네요."

나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어차피 너를 완전히 선 안에 둘 수 없었으니 최대한 선 바깥에 두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이것부터가 자신을 속인 일이었겠지만. 아끼지 않았다면, 매번 내가 들릴 수 없으니 네 냉장고에 밑반찬을 해놓을 일도 없었을 터였다. 나는 너를 만난 이후로 마음을 빗겨 보고 있었다.

체육관 앞 부둣가에서 우리는 가만히 앉아 있고는 했다. 바닷바람에 머리칼이 날리는 너를 보면 눈이 시렸다. 나도 모르게 한참 너를 보고 있으면 너는 가끔 아버지와 바다 이야기를 했다. 경찰과 선생 같은 어른들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아빠가 일 끝나면 어디 바다에 가서 살자고 했거든요. 아빠가 살아 있었으면 지금쯤 어느 바닷가 마을에 둘이 있었을까요?"

 나는 들을 자격이 없는데. 너는 네 이야기를 자꾸 했다. 대답하지 못 하는 말들이 늘어갔다. 

"선배는 안 듣는 척 하면서 다 듣는 게 보여서 편해요."

그래. 네가 하는 말은 다 듣고 있었다. 다만 답할 수가 없는 말들일 뿐이었다.

"... 춥다. 들어가자."

네 뒤에서 걷는 일이 익숙해지는 사실이 조금 기꺼웠다.

네 집에서 밥을 먹고 나서 맥주를 마실 때 너는 비싼 술을 마시고 싶다고 조르곤 했다. 나는 네 성화가 재밌어서 맥주를 들고 올 때도 있었다. 너는 럼이나 와인보다는 보드카가 좋다고 했고 온더락으로 마시는 게 제일 낫다고 했다. 

"적당히 마셔. 내일 운동 안 빼준다."

"분위기 깨기는."

"까분다."

"이거 마신다고 내일 골골거리지도 않으니까 빨리 짠이나 해요."

"아직 어리네."

"뭐예요? 아저씨 같아."

"같은 게 아니라 너한테는 아저씨지."

네 취향들이 내 습관이 됐다. 된장찌개, 팝송, 보드카 온더락, 부둣가. 조직 일을 제외하고는 내 일상의 대부분이 너였다. 너 역시 조직의 일이었지만 이상하게 다른 것만 같았다.

 

 

03

정태주. 어느 날 취한 너는 내 이름을 불렀고 나는 사랑받고 싶어서 무서웠다. 가만히 얼굴을 보다가 네 집을 나왔다. 어떤 일은 이미 벌어진 후에야 막을 수 없음을 안다.

네 학교가 끝나는 시간에 자주 너를 데리러 갔다. 꼴에 경찰대라는 이유로 교문이 아닌 그 근처에 차를 대고 있으면 너는 나를 찾아 걸어왔다. 

"오늘 수업이 길어졌어요."

"그럴 것 같았어. 이 수업 자주 늘어지잖아."

"교수가 짜증 나요."

"그렇다고 치면 안 된다."

"선배 농담도 짜증나."

"스파링 추가하고 싶지."

"... 진짜 싫어, 정태주."

최무진은 가끔 너를 찾았고 뱃머리 식당에서 만난 둘은 꼭 진짜 아빠친구와 친구딸처럼 서로 편해 보였다. 아저씨 요새 추운데 따뜻하게 입고 다니세요. 그래. 내 걱정하는 건 너밖에 없다. 둘의 대화는 평범했고 나는 최무진이 조금 무서웠다.

소주가 잘 받지도 않으면서 계속 넘기는 너를 보고 취할 줄 알고 있었다. 차에서 기다리다 너를 업고 집으로 데려가 눕혔다. 잠든 너의 얼굴을 보고 나는 신을 버린 지 오래였지만 너를 위해서는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네 얼굴을 바라보다가 일어날 순간을 놓쳤다. 너는 뒤척이다가 잠에서 깼고 내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너는 몸을 일으켜 나를 안았다.

"지우야."

너를 밀어내려고 했으나 어깨에 닿는 네 호흡이 데인 것처럼 뜨거워 힘을 줘 밀어낼 수가 없었다. 어떤 말이든 핑계에 불과했다. 나는 너를 이길 수 없었고 네 앞에선 속절없이 무너졌다. 입술을 부딪혀오는 너의 허리를 받쳤다. 너는 갈급한 사람처럼 굴었고 나는 네가 아플까 속도를 늦추기 위해 입술을 물었다. 발갛게 달아오른 네 낯은 무엇보다 사랑스러워서 행위보다 너를 보는 일이 더 흡족했다.

나는 품에 안겨 잠든 너를 보고 유산을 셈했다.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을 저질렀고 속죄는 더 요원해졌다. 직감했던 비극보다 더 최악의 결과가 벌어졌다. 너를 마음에 둔 것은 맞았으나 분명 무엇도 주고받지 않았어야 옳았다. 이미 결정된 과거는 너의 최악이었고, 나는 그 일부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감히 나는 네 이름을 유언으로 삼아 마지막에는 네게 들려주고 싶었다. 감히 너를 품었다.  

네가 잠에서 깬 후 우리는 장난처럼 먼 이국의 이름을 세어봤다. "떠날까요?" 하는 물음에 나는 "그럴까." 하고 답했다. 네가 가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정말 떠나기를 바란 쪽은 나였는지도 모른다.

 

 

04

너는 경찰대를 졸업했고 나는 졸업식에 갔다. 

여전히 교문 안은 들어가지 않았고 교문 밖에서 너를 기다렸다. 꽃다발을 건네자 고맙다고 말하는 너는 여전히 어렸다. 여전히 삶의 제일 잔인한 부분은 알지 못 했다.

너는 잠입 준비를 시작했고 나는 이제 네가 없는 일상으로 가야 했다.

만나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었다. 오랜만에 만난 너는 평소보다 긴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우리 그만해요."

"... ... 그래."

나는 네가 해달라는 걸 다 해주고 싶었다. 제일 중요한 것을 들어주지는 못 하지만.

공채에 붙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혼자서 졸업식에 갔던 꽃가게에서 꽃다발을 샀다. 조수석에 한참 놓여 있다가 바스러지기 시작해 버렸다. 아마 졸업식에 줬던 꽃다발이 마지막이 되겠지 싶었다.

 

 

05

너는 마수대에 들어갔다.

선상공장에서 너를 마주쳤을 때 네가 아직 아무것도 모른 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최무진의 도주로를 열어주었단 것도 알았다. 그러나 최무진에게는 안 해도 될 질문을 했다.

"지우가 왜 말을 안 했을까요?"

돌아온 도강재는 완전히 변해 있었고 이는 내가 선택한 결과였다. 제 수하의 목을 그으려 해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은 사람으로 변한 도강재는 왠지 사실을 알고 난 후의 너를 떠올리게 했다. "얼굴, 팔, 다리 하나만 고를게 하나만 할게. 못 고르겠지? 나도 그랬어." 

지우, 아니 오혜진과 구급차에서 마주쳤다. 너는 경찰 같았다. 배에서보다 더. 동천파의 행동대는 박살 났다. 동천파를 지키기 위해 최무진의 말을 들었던 행동은 결국 동천파를 무너트리고 있었다. 내게 소중한 것은 아무것도 지키지 못 했다. 도강재도 동천파도 윤동훈도 지우 너도 다. 깊숙하게 패인 팔의 상처가 꼭 지키지 못 한 벌을 받는 것 같았다. 내가 한 선택들은 결국 다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06

절에서 열린 장례식은 성대하게 치러졌다. 

조직은 너희의 죽음에 보답한다는 것을 보여줘야 했다. 동천파는 내 가족이고 집이었다. 더는 무엇도 잃고 싶지 않았다.

최무진은 도강재를 찾으라고 했다. "겁나냐?" "아닙니다." "이렇게 당하고 가만히 있으면 조직이 무너진다." 나는 여전히 최무진의 결정을 따르고 있었다.  

모두를 모았을 때 최무진은 지우의 말을 듣고 일을 멈추게 했다. 차기호의 장난질이라고 했다. 최무진은 나보다 지우를 더 믿었다.  

최무진은 지우를 도강재에게서 구하기 위해 다친 몸을 이끌고 갔다. 이제 지우를 위해 직접 행동 하는 사람은 최무진이었다. "고작 지우 때문에. ...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배에서 총을 쏜 건 지우였다. 신분이 발각될 위험을 무릅쓰고 움직였던 거야. 넌 뭘 했냐? 어? 태주야. 내가 널 믿어도 되겠냐?" "죄송합니다." 모든 걸 알게 되면 죽여야 한다는 그 말에 동의하는 척이라도 하던 최무진은 없었다. 지우도 병원 신세라고 했다. 모든 것이 엉망이다. 

지우가 깨어나 마수대와 함께 있는 장면을 보며 속이 쓰렸다. 너는 어느 때 보다 편안해 보였다. "지우 위치 확인했습니다." 최무진이 지우를 보내려고 하는 걸 알았다. 지우가 떠나지 않을 것을 알았지만 떠나기를 바랐다. 최무진과 지우에 대한 생각이 처음으로 일치했다. 

"넌 생각이 너무 많아. 모든 걸 의심하고 가장 안전한 길을 찾지. 난 지우를 믿는다." 강재가 밀입국을 한다고 했고 최무진은 강재를 잡는다고 했다. "넌 여기 남아 문제가 생기면 누군가 조직을 정비해야지." 함정이 분명한 상황에서도 최무진은 지우를 믿고 행동했다. 과연 그게 지우를 위한 일인지 나는 최무진의 결정에 점차 의심이 늘어갔다.

 

 

07

차기호를 찔렀다. 

"태주야, 지우는 일을 끝내지 못 할 것 같다. 네가 차기호 정리해라." "예 알겠습니다." 결국 지우는 조직을 위한 칼이 아니라 최무진의 놓지 못 할 과거를 위해 키워진 것이다. 나는 네가 그 과거를 책임지는 일이 없기를 바랐다. 이 모든 것은 네 잘못이 아니었다. 

"차기호가 살았습니다. 죄송합니다. 현장에 지우가 있었습니다. 진실을 알았을지 모릅니다. 죽여야 합니다." 

차기호와의 싸움에서 도강재가 망가트린 팔이 다시 한 번 작살났다. 나는 너를 이길 수 없는 상태였다. 너와 처음 함께 누웠을 때부터 생각한 일을 해낼 시간이었다.

 

 

08

내가 말했었지, 어리석은 짓이라고. 배신자의 딸 주제에 우릴 찾아와서 범인을 죽이겠다고? 동훈이 형님 가까이서 모셨어. 조직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어. 아무것도 모르고 조직의 칼로 산 기분이 어때? 

우리 아빠 죽인 게 너지. 

내 손으로 직접 죽이고 싶었지. 형님은 배신자를 반드시 직접 죽인다. 숨이 끊어지는 그 마지막 표정을 보기 위해서. 네 아버지 마지막 표정이 어땠을까. 넌 어떤 얼굴로 죽을 거냐? 

너는 급소를 노렸고 힘줄을 끊어냈고 꼭 체육관에서 싸우던 날 같았다. 내가 고른 집에서 네가 죄 가져다 버린 물건들이 있던 집에서 나는 조금 편했을지도 모른다. 

니들 같은 새끼들도 사람이냐? 

너는 아직 사람이냐. 

네가 우는 얼굴이 오랜만이었다.

송지우. 나는 네 이름을 유언으로 삼고 언젠가 끝나는 날에 너에게 닿기를 기도했었다. 나의 모든 최선이 너의 최악일 뿐이었을 때 나는 네 이름을 유언으로 삼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우리가 최악이 아닌 나라에서 만나자. 오롯이 네 결정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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