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로라
@영(0wallst)
증명을 업으로 삼은 삶은 자주 무거웠다. 어떤 날은 팔이 썰리고 어떤 날은 뱃가죽을 뚫고 들어온 칼이 속을 헤집기도 했지만 그렇게 정의되는 생만을 살아왔기 때문에 다른 방법은 알지 못하고 순응했다. 나의 생은 내 것이 아니었다. 그는 명령했고 나는 따랐다. 조직을 위해 산다는 것은 조직을 위해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의미했고 숙명이니 운명이니 거창한 단어를 붙이지 않아도 그만한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는 이 짓을 계속 할 수 없었다. 피 묻은 옷을 입고 밥을 떠먹는 날이 숱했다. 내가 키운 새끼들을 내 손으로 죽인 날은 밥 대신 소주를 마셨고 그는 그런 나를 알면서도 굳이 아는 체하지 않았다. 차라리 그게 고마웠다. 시간이 지나며 술은 줄었는데 담배가 늘었다. 아무리 독한 향수를 써도 옷깃에 벤 사멸의 냄새를 지울 수가 없을 무렵에 그 애를 만났다.
엄마 닮았나 보네. 처음 든 생각은 그거였다. 흐트러진 머리 위로 성기게 꽂힌 머리핀. 맞지 않는 상복을 걸친 채 울던 그 애는 어딘가 빈 눈이었고 배신자의 딸이었다. 제 아빠를 죽인 사람에게 누가 우리 아빠를 죽였냐 묻는 어리석음을 탓할 수 없을 만큼 미욱해서, 그래서 조금 들여다보게 됐다. 차마 울음이 가시질 않는 듯 자꾸만 작은 주먹을 쥐었다 폈다. 그 애는 계속 아무것도 모르는 게 나았다. 아무것도 모른 채로 두는 게 내가 망자를 위해 보일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였다. 그래서 다시 만나지 않았으면 했다. 다시 만나서는 안 됐다. 하지만 이번에도 신은 귀 기울이지 않았고 형형한 비웃음처럼 재회했다. 물불 안 가리고 달려드는 건 제 아버지를 닮았나 보지. 겁 많은 주제에 손부터 나가는 것도 그렇고. 그러면서 미련하게 우직한 것도.
복수를 하고 싶다고 했다. 하게 해주란다. 의중을 알 수 없어 답답했지만 나는 또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하고 이름 모를 어떤 것을 자처했다. 그는 괴물이었는데 나는 무명이었다. 그래서였나. 자꾸 그 애가 시선 끝에 걸렸다.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내려진 명령보다 다른 것이 앞섰다. 구렁텅이에 제 발로 걸어 들어온 어린 짐승 같은 몰골로 그 애는 빈 주먹을 더 단단히 쥐었다. 온종일 굶은 들개 새끼처럼 구는 사내놈들 틈에서도 가시를 세우느라 하루를 다 쓰는 게 보였다. 어깨에는 늘 힘이 들어 있었고 눈 한 번 편히 깜빡이지 못하는 주제에 연신 이를 악물었다. 그러고는 아무도 없는 밤 샌드백을 때리며 눈물 대신 땀을 흘렸다. 해무가 깔리는 새벽에만 들리는 가는 흐느낌을 모른 척하고 싶었다. 눈에 걸리니 마음에도 걸렸다. 그래서 보내려고 했다. 굳이 고른다면 그 애가 가장 크게 무너진 날이어야만 했다.
다 울었으면 이제 가라. 너 때문에 오늘 난 아끼던 수하를 잃었어. 지금이 마지막 기회야. 어리석은 짓을 그만둘 수 있는 기회. 제발 들어라, 빌어먹을 말 좀 들어라, 그러면서 뱉었다. 한 글자, 한 글자 공을 들인 게 무색할 정도로 그 애는 건조하게 답을 냈다.
"전 아무 데도 안 가요."
멈추기에는 이미 늦었습니다. 손을 뻗어 만지면 퍼석거리며 부서질 것 같은 몰골로. 뺨과 눈가에는 당연하다는 것처럼 멍을 단 채로 저런 걸 대꾸랍시고 뱉어낸다. 빗금 그어진 팔로도 기어코 샌드백 앞에 선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목이 따끔댔다. 깨진 유골함을 쥐어 벌어진 상처는 열일곱 하고도 두 번을 더 꿰매야 했다. 그 애가 살았던 날보다 많이 그어진 빗금들은 또렷한 흉으로 자리 잡을 것이다. 비가 오는 날 칼을 맞으면 더 오래 아프고 흉도 크게 남는 법이라고, 그 애 아버지가 말했었다. 차마 그 말을 돌려줄 수는 없어 침묵으로 빌었다. 쏟아지는 비 좀 줄여달라고.
그 애가 이름를 버린 뒤에는 둘이 보내는 시간이 늘었다. 따로 지낼 곳과 훈련할 곳을 찾아봐 주고 필요한 것은 없는지 어디 다치거나 아픈 곳이 있는데 참는 건 아닌지 밥은 잘 먹는지 공부는 힘들지 않은지 아주 많은 것들을 살피고 챙겨야 했다. 그 애의 주변에 머물며 살피는 것이 전부 내 몫으로 돌아오는 게 무거웠지만 불만은 접수되지 않았고, 하는 수 없이 좁아 든 거리감 또한 유쾌하지 않았다. 그 애가 언제까지고 배신자의 딸이길 바랐다. 속절없이 물든 정을 도려내다 내 살점까지 잘리고 싶지 않아 일부러 건조하게 굴었다. 쉽지는 않았다. 요즘도 그 애는 밤이 되면 가끔 울었지만 조금 자랐다. 뺨이 마르고 가느다란 몸에도 제법 근육이 붙은 만큼 손바닥의 굳은살도 늘었다. 그의 지시로 삼계탕을 사다 주니 곧잘 먹는다. 이건 어디서 사 온 거예요? 하고 묻는 얼굴이 조금 맹해서 그제야 제 나이처럼 보였다. 형님이 보내셨다는 말에 주억이는 볼이 부풀어 빵빵했다. 다음 날부터는 즉석밥과 조리된 반찬 몇 개를 사다 날랐다. 봉지를 들추던 그 애는 한참을 머뭇대다 이거 제가 좋아하는 거예요, 하고 메추리알 조림을 들어 보였다. 감사합니다.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 아래 고개가 푹 숙여진다. 멀건 목덜미 노려보다 눈 돌린다. 아무래도 내 살점 몇 개 같이 떨어지려나 보다. 담배가 말렸다.
그 애는 훌쩍 가는 시간을 조급해했고, 나는 그저 흘려보냈다. 함께 옷자락 쥐고 뒹구는 날이 길어질수록 자연스레 습관이 옮아갔다. 내게서, 그 애애게로. 칼을 쥐는 손 모양, 날이 스칠 때 몸을 굴리는 궤도, 움직이기 전의 발 딛음. 사소한 것부터 그렇지 않은 것까지 내 손이 닿았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싸울 때 널 많이 닮았더라. 그가 흩어지듯 한 말 또한 마음에 얹혔다. 뿌옇게 흐린 부채감이 켜켜이 쌓인다. 그 애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 어느 날은 저를 싫어하지 않냐고 물었다.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왜 자꾸 들여다보느냐고. 혹시 자신이 신경 사납게 굴지는 않았는지 물으며 조심스럽게도 눈을 굴렸다. 그래. 그래봤자 열여덟이었다. 그 위로 교복 버리던 다른 자취 하나가 덧대인다. 왜 하필 너는 어리고. 그 어린 모습이 나를 닮아서.
혓바닥 아래 묻어둔 진실이 깔깔하게 입 안에 생채기를 내는 걸 알면서도 나는 답하지 않았다. 사람을 매달고 팔다리 끊어내 반병신 만들고 그러다 죽이는 일을 격주로 하면서도 지치지 않던 몸이 그 애를 만날 때마다 곤했다. 집이라고 부르기도 삭막한 공간으로 돌아와 너른 침대에 몸을 뉘면 수마에 잡혀 들어가는 것처럼 까라졌다. 그렇게 일 년 지날 무렵에는 투정에 못 이겨 담배를 알려줬고, 이 년 지나갈 때는 훈련 끝난 뒤 등에 기대오는 걸 내버려 두었다. 좌시만이 내 변명으로 남았고 머지 않아 윤지우는 경찰이 됐다. 가슴 한편 가로지른 문신을 훈장 삼은 듯 바라보던 그 애는 자꾸 가까워졌고, 그러므로 더 멀어졌다. 축하한다고는 차마 못해 고생했다는 내 말에 내심 뿌듯했는지 발을 휘적이는 애를 데리고 나가 새로 운동화를 사 줬다. 뛰어야 할 일이 많을 테니 넘어지지 않도록 신발끈을 두 번 매듭짓는 법을 알려주었다. 무거운 진실과 유일한 복수 같은 건 다 뒤로 제쳐두고 그냥 자주 다치지만 않기를 바랐다.
바람 한 번 무색하게 그 애는 자주 다쳤고, 다칠 때만 나를 찾았다. 병원 못 갈 신분도 아니면서 꼬박꼬박 내 번호를 누르는 성실함에 못 이긴 척 빈 집에 들었다. 좋은 구실이기에 의심 많은 그의 눈을 피하기도 좋았다. 식은땀에 젖은 머리칼 손수 넘겨줄 때마다 마음 깊은 곳 어딘가가 야금야금 허물어졌다. 선배. 나 아파요. 벌려오는 팔을 마다할 수 없어 끝내 마주 안았다. 죄책과 자책, 부채와 책망이 한데 모여 엉기고 또 고인다. 터진 댐처럼 흘러넘칠 때에는 나란히 누워 맨 어깨 끌어안은 새벽 속이었다. 동이 트고 있었다. 나는 네 손에 죽겠구나. 깨닫는 동시에 다짐한다. 내가 네 손에 죽을 거라고. 한 번 더 되새기며 손등 위로 입 맞췄다. 배운 게 없는 나는 속죄를 이렇게 밖에 할 수가 없다.
그날은 아침이 오지 않게 해 달라고 소리 내 기도했다. 부질 없는 짓이었지만 잠든 얼굴 내도록 볼 수 있는 것만으로 좋았다.
여기서 먼 고위도 어느 나라의 하늘에는 오로라가 있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그 멀리까지 가더라도 날이 흐려서, 시간이 맞지 않아서 그것도 아니면 그냥. 별 이유를 다 붙여가며 나타나지 않다가 드문 확률로 만날 수 있다는 빛의 장막. 살며 우연히 만나는 데 온 운을 다 쓴다는 그게 내겐 정말로 그 애 같았다. 바라보다 선뜻 눈 멀어도 좋을 것 같은 점이, 잡으려고 뛰어선 안 된다는 점이 닮았다. 그리고 또 뭐더라. 부시게 아름답다는 거.
막아서지 못했기에 시작부터 거짓으로 다져진 관계의 끝이라면 응당 이래야만 했다. 이게 맞았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밀려오는 아쉬움을 가눌 길이 없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좋아한다던 바다나 한 번 더 데리고 갈걸. 무정이 아니라 다정으로 대할걸. 이렇게 말고 더 좋은 방법으로 손 한 번 잡아볼걸 그랬지, 지우야.
죽는 것도 일이라 죽음이라 부른다는데, 그러니 이왕 죽는다면 그 일 하나 만큼은 네 두 손에 맡길 수 있길 함부로 바랐다. 쓸 수 없는 한쪽 팔로 텅 빈 가슴 팍에 억지로 칼 하나만 챙겨 쉽게 죽어주지 않을 그 애에게 쉽게 죽으러 다가가며 생각했다. 나는 지금 설원으로 가고 있다고. 가르치고 먹이고 기르고 재우다 섣불리 마음 줘 짧은 생 전부 태워버릴 오로라가 있는 그곳으로 가서, 딱 한 번 너를 만나고 딱 한 번 네 손에 죽을 거라고.
내가 가진 운 전부 쏟아 네 손에 숨 거둔다. 그러니 생의 끝자락에서 부디 홀로 울고 있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