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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적 온도 微視的 溫度
​@찬미(maiufurey)

 정태주는 근래에 몇 가지 사실을 깨닫는다. 그것들은 대체로 윤지우에 대한 것이다. 아니, 사실 그것들 모두가 윤지우에 대한 것이다. 첫째, 윤지우는 곁에 사람이 있으면 혼자 잘 때보다 더 잘 잔다. 둘째, 그러나 윤지우는 누군가와 함께 잘 때에조차 얼굴을 찡그린다. 셋째, 윤지우는 앞의 두 가지 사실을 부인한다. 정태주는 마지막의 한 문장 때문에 그 앞의 두 문장을 모르는 척한다. 그래야 하는 이유는 알 수 없고 단지 그렇게 해야 할 것 같기 때문으로, 실상 정태주 본인도 모르는 막연한 부채감을 기저로 한다. 정태주는 윤지우가 자신을 좋아하길 바라지는 않았다. 물론 싫어하길 바란 적도 없었으나, 막상 당사자인 윤지우의 의중은 중요하지 않았다. 신경 쓰기 싫었다기보다는, 애초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는 말이 적확했다. 둘은 최선을 다해 서로가 가진 생의 맥락을 모르는 척했다. 역린이었고, 역치閾値였다. 윤지우 본인은 몰랐겠지만, 윤지우는 정태주의 약점이었다.

 윤지우가 오혜진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이후로 둘은 종종 한 침대에 누웠다. 나란히 누워서 잠만 자는 날도 있었고,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들처럼 살을 섞는 날도 있었다. 그러나 그 어느 순간에도 윤지우는 정태주를 사랑하지 않았다. 윤지우는 당연하게 정태주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둘 중 하나가 상대방을 사랑하게 되어도 어쩔 수 없다고, 특유의 암울한 얼굴로 용인할 뿐이다. 윤지우는 자신이 정태주를 사랑하게 되기 전 반드시 그를 죽이겠노라 다짐했다. 죽어서 영원히 내 안에 묻히기를. 당신을 기억하는 사람도 같이 순장해 주겠다고. 그 끝엔 아마 나도 있을 거라고.

 윤지우는 자면서도 앓았다. 윤지우의 불편한 신음을 듣고 깬 정태주는 구겨진 윤지우의 미간을 가끔 펴 주었고, 그것보다 더 가끔 윤지우의 손을 잡아 주기도 했다. 윤지우와 섹스한 날마다 정태주는 윤지우에게 칼을 쥐여주고 자신을 죽여 달라고 하고 싶었다. 반드시 죽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정작 윤지우는 아무 말 없이 잠드는데도. 정태주는 차라리 윤지우에게 뺨이라도 맞고 싶었다. 미친 새끼라고, 찢어 죽일 거라고, 차라리 악다구니라도 써 주었으면 했다. 그러나 윤지우는 처음 섹스한 그 날부터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어쩌면 윤지우는 스스로를 학대하는 일에 자신을 이용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정태주는 생각했다. 그런 이유로 정태주는 자신을 못 견뎌 했다. 세상이 다 허락해도 자신만큼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게 있었다. 윤지우가 그랬다.

 정태주는 처음부터 끝까지 윤지우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한여름 밤의 꿈 같은 추억도, 아기자기한 약속도 가져본 적 없었다. 그래서였다. 어느 날 관계를 마친 뒤 윤지우가 바다에 가고 싶다고 말했을 때, 정태주는 빠져 죽으려고 그러는 것인가 하고 생각했다. 정태주에게 바다는 그랬다. 특히 밤바다가 그랬다. 정태주는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첫사랑을, 아주 오래전 바닷가에 살았을 때의 일을 애써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태주야. 나는 나중에 바다에서 죽고 싶어. 그러므로 정태주는 윤지우가, 아니, 송지우가 부친 송준수와 무슨 약속을 했었는지, 어디서 누구와 살고 싶었는지 따위는 계속 몰랐어야 했다.

 나의 바다에선 매일 누군가가 죽는데 너는 기어이 이런 습하고 짠 곳에 마음을 묶어 두는구나. 그렇다면 나는 네가 앞으로도 계속 살고 싶으면 좋겠다. 어디에라도 산다면 좋겠다. 그래서 너와 내 사이가 영원히 멀었으면 좋겠다.

 윤지우는 좀처럼 소리를 내지 않았다. 좋은 티도, 아픈 티도 내지 않았다. 다만 아주 가끔씩 미간을 찌푸릴 뿐이었다. 적응된 어둠 속에서 정태주는 윤지우의 벗은 어깨보다도 이에 짓눌린 입술과 떨리는 아래턱을 먼저 눈에 담았다. 정태주는 윤지우의 안으로 파고들 때마다 혹시 지금 자신이 윤지우를 죽이고 있는 것이 아닌지 생각했다. 어쩌면 이미 죽은 윤지우와 자신이 교접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도. 죽고 싶었다. 부패한 애정이야 억지로라도 소화 시켜 삼키면 그만이었다. 티만 내지 않으면 된다. 지금까지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흉진 손바닥 위로 제 손을 겹치고 싶어 하는 자신을 용서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시도하지 않았다. 윤지우도 자신을 용서하지 않길 바라며. 윤지우가 허리를 크게 뒤틀며 고개를 뒤로 젖혔을 때, 정태주는 최초로 윤지우에게 입을 맞췄다. 동시에 정태주는 윤지우의 손이 자신의 목을 조르는 상상을 해 보았다. 타인의 손으로 하여금 자신을 죽이게 한다면 그건 윤지우여야만 한다고 생각하면서.

 무슨 좋은 일 있으십니까. 정태주는 심상한 표정으로 무슨 좋은 일, 하고 물었다. 분명 의문문인데 음에 고저가 없어 그저 평서문 같았다. 윤지우는 정태주의 그런 말투에 익숙했다. 그냥요. 오늘은 죽을상 아니시길래 여쭤본 겁니다. 저랑 잘 땐 그런 표정 하신 적 없으시잖아요. 정태주는 윤지우가 자신을 벼랑 끝으로 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갈 곳이 없다는 걸 알면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는지 시험이라도 해 보려는 것 같다고. 그런 거 기억하지 마. 윤지우는 다 알면서도 그런 게 뭔데요, 하고 물었다. 정태주를 괴롭게 하고 싶었다. 오랜만에 가져 본 욕심이 불순했다. 그러니 어떤 방식으로라도 좋았다. 건조한 얼굴이 한 번은 젖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안 될 걸 알면서도. 나에 대한 거 전부. 윤지우는 죽이고 싶은 마음도 사랑일 수 있는지 묻고 싶었다. 그러나 입에서 나온 건 다른 말이었다. 윤지우는 늘 아슬아슬하게 최악만을 피해 갔다. 저한테 미안하십니까? 정태주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고, 윤지우는 입을 다물고 선 정태주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일전의 결심을 폐기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기 위해 당신을 살려 둡니다.

오래 사세요.

 

 정태주는 윤지우가 남긴 메모를 한참이나 바라보다 빈집을 나왔다. 사람의 마음이 죽어도 날씨는 맑았다. 정태주는 윤지우가 떠난 지 석 달쯤 되던 날 남해의 어느 해변에서 발견되었다. 사람의 마음이 죽어서 십이월의 첫 주에는 눈이 아닌 비가 내렸다. 저물 곳 없는 사랑이 수몰水沒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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