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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기억, 기억의 죽음
​@윤(_CSxNS)

 나에게는 아무도 모르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병에 가깝지만, 어릴 때는 그게 나에게 주어진 초능력 같은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나는 기억을 잊지 못한다. 망각이 없는 삶, 그것이 내가 유일하게 가진 것이었다. 사람들은 과잉 기억 증후군이라고 부르는 것. 그것이 나에게 내려진 저주였다. 나의 첫 기억은 인큐베이터 안에 들어가 있는 순간이었다. 이상한 기계 소리, 딱딱하고 어두운 공간. 사실 어릴 때는 모든 걸 다 기억한다는 사실이 좋았다. 인생의 고통을 모르는 어린아이에게는 언제든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 기억 여행을 떠날 수 있는 능력은 아주 매력적인 것이니까.

 

 이 병이 저주라고 생각하게 된 건, 엄마의 죽음을 맞이했을 때였다.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다는 나의 말에 집 앞 슈퍼까지 손을 잡고 걷던 그 겨울날.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자동차를 발견하고 엄마가 나를 밀쳤을 때, 처음 들어보는 굉음이 들렸다. 그 소리에 놀랐던 나는 본능적으로 엄마를 찾으며 울었다. 처음이었다. 엄마를 부르는 소리에 대답이 들려오지 않은 건. 엄마의 피가 도로를 적시는 동안 하늘에서는 눈이 내렸다. 붉은 피에 닿은 눈은 순식간에 녹았고, 빠르게 식어가는 엄마의 몸을 붙잡고 우는 내 몸 위로는 차가운 눈이 펑펑 쏟아졌다. 차갑고도 핏빛 가득한 그날의 기억은 그렇게 뇌리에 각인되었다.

 

 내가 모든 것을 기억한다는 사실은 아무도 몰랐다. 애가 유난히 똑똑하다며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기는 부모님 때문이었고, 좀 더 커서는 말할 상대가 없어서 그랬다. 엄마가 죽고 나서 아빠는 집에 들어오지 않기 시작했다. 일이 바빠 집에 잘 못 들어오니 잘 지내고 있으라는 말을 남겨두고서 현관을 나서버린 아빠를 다시 만난 건 한 달이 지난 후였다. 그동안은 할머니께서 나를 봐주시곤 했지만, 엄마의 죽음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나는 방 안에 틀어박혀 울기만 했고, 연로하신 몸으로는 울기만 하는 어린 아이를 감당하기 힘드셨던 건지 밥만 차려주시고 경로당으로 나가버리셨으니까.

 

 아빠가 돌아온 후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갈 줄 알았던 어린아이의 기대가 무참히 짓밟힌 건 이틀 후였다. 또다시 집을 나간 후로 아빠는 짧으면 한 달, 길면 반년 만에 집에 들어오곤 했다. 집에 돌아온 아빠가 하는 일은 술을 마시고, 늘어지게 자는 것뿐이었다. 학교도 들어가지 못한 어린 자식의 안위는 관심도 없었던 모양이다. 내가 여섯 살이 되던 무렵에는 할머니까지 돌아가셨다. 내 곁에는 아무도 없었고, 한가로이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아빠가 미웠다. 어둡고 차가운 방에서 혼자 잠드는 게 무서웠고, 외로웠으니까. 학교에 들어갈 무렵에는 스스로 준비물을 챙기는 게 당연했고, 밥을 하고,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는 그 일련의 과정이 익숙해져야만 했다. 더럽게 선명하고 끔찍한 그날의 기억을 잊지도 못한 채로 말을 잃어갔고, 아프고 무섭다고 말하는 법을 잊어갔다. 그 탓에 소름이 끼친다며 나를 따돌리는 아이들은 늘어갔고, 내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점점 사라져 갔다. 고등학교 때까지 똑같은 삶을 살았다. 환경이 바뀌어도 다가오는 사람은 없었고, 여전히 나는 혼자였다.

 

 내 삶이 이보다 더 최악일 수는 없다고 생각했을 즈음, 어느 날부터 집 앞에 차 한 대가 서 있었다. 그 안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아빠를 찾는다고 말했다. 처음엔 빚쟁이들인가 싶었는데, 그렇다고 하기엔 집에 억지로 들어오려고 하지도 않았고, 나를 때리거나 겁주지도 않았다. 그 차 안에서 무전기와 총을 발견했을 때, 그 사람들이 형사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 형사들이 학교까지 찾아왔을 때, 나는 깨달았다. 내 인생도 더 내려갈 바닥이 존재한다는 걸. 

 

 형사들이 다녀간 후로 선생님은 나를 여러 번 부르셨다. 상담실도 아닌 교무실로. 목소리나 작으시면 몰라, 큰 목소리로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아빠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다. 아버지가 마약 유통하시는 건 알고 있었냐, 자꾸 학교에 형사들 찾아오게 하지 말아라, 너희 아버지가 조폭이든 뭐든 학교에 피해만 주지 마라. 선생이라는 작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하나같이 거칠고 날카로웠다. 하지만 그 말들보다 더 따가웠던 것은 교무실에 있는 선생들과 학생들의 시선이었다.

 

 학교에 소문이 도는 건 금방이었다. 쟤네 아빠가 조폭이래, 마약 팔다가 걸렸대, 쟤네 아빠 뽕쟁이래. 소문은 결코 사실대로 퍼지는 법이 없다. 시발점을 모르는 소문이 윤지우가 마약을 하다가 걸렸대, 로 바뀌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시점부터 나는 완전히 입을 닫았다. 해명할 의지도, 가치도 없는 일에 감정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매일을 엎드려 지냈고, 누구도 나를 깨우지 않았다. 그러나 속에서는 주체할 수 없는 원망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아빠에 대한, 그리고 세상에 대한 원망. 그즈음에는 눈도 자주 내렸다. 눈만 내리면 엄마 생각이 나는 탓에 절로 무기력해지고 어둑한 방 안에서 미동도 없이 누워있기만 하는 나라서, 학교도 나갈 수가 없었다. 아마, 학교에서도 그걸 원했겠지만.

 

 며칠 간 학교에 나가지 않으니 담임에게서 연락이 왔다. 학교 그만둘거냐고 묻는 그 목소리에는 약간의 기대감마저 서려있는 것 같아서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다. 더는 버틸 힘이 없었다. 아무리 감정에 무던한 나라지만 유일하게 마주하는 사람들이 나를 혐오하는 그 경험은 꽤나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나는 아직도 그때의 내가 대견하다. 그만두는 방법조차 몰라 어거지로 버틴 것이었지만, 어린아이가 버텨내기에는 과도한 감정이었고, 혐오였다.

 

 하필 그날은 내 생일이었고, 아빠는 여전히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현관 앞에 놓인 선물을 걷어차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온기라고는 없는 공간에서 억지로 눈을 감았다. 깊게 잠들지 못한 탓에 금세 눈을 떴다. 밖을 내다보니, 아빠가 서 있었다. 걸어둔 잠금장치를 풀려는 순간 다시 한번 울리는 발걸음 소리, 그리고 두 발의 총성. 억지로 문을 열고 나간 나를 맞이한 건 피를 흘린 채 쓰러진 아빠. 나는 그렇게 가족을 또 잃었다.

 

 이쯤이면 모든 게 내 탓 같았다. 아빠를 원망한 세월이 미안해서 그놈을 찾으러 다녔다. 죽을 뻔한 적도 있었고, 이상한 곳에 끌려갈 뻔한 적도 있었지만 그만둘 수는 없었다. 집에 돌아와서 겨우 눈을 붙였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이 달아나 신경질적으로 밖을 보니 낯이 익은 남자가 서 있었다. 아빠의 장례식장에서 본 마약 조직 보스의 옆에 서 있던 남자.

 

 

“여긴 무슨 일이세요. 그 개새끼 찾았어요?"

“오늘부터 나랑 같이 살아야 해. 집도 옮길 거니까,”

“그게 무슨 미친 소리에요? 그쪽하고 제가 왜 같이 살아요?”

“너야말로 요새 미친 짓 많이 하고 다녔잖아. 겁도 없이. 너를 지키는 게 나한테 떨어진 명령이야. 난 그걸 따라야 하고. 시간 없어. 중요한 것만 챙겨.”

“그러니까, 제 안위를 왜 그쪽에서 신경 쓰시냐고요. 제 목숨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동훈이 형님. 가까이서 모셨어. 너는 아버지를 잃었고, 나는 형님을 잃었다. 우린 너를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어. 형님의 죽음을 막지 못한 건, 어쩌면 우리 책임도 있을 테니까.”

 

 

 그렇게 말하는 그 남자의 눈이 슬퍼 보여서 더는 어떠한 말도 하지 못한 채, 눈에 보이는 짐을 챙겨 남자를 따라나섰다. 차에 타서도 한참을 갔을까, 깔끔한 건물 앞에 멈춰 선 차. 집 안으로 들어서니 누군가의 손길이 가득 묻은 내부가 보였다. 이 남자가 살던 집일까, 하고 주위를 둘러보는 데 익숙하게 집 안을 돌아다니는 모습이 내 추측이 어느 정도 들어맞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여기 그쪽 집이에요?”

“어. 근데 넌 어린애가 말끝마다 그쪽, 그쪽.”

“이름을 모르는데 뭐라고 불러요.”

“정태주. 이사님이라고 부르던가.”

“아저씨라고 하죠, 뭐. 아저씨는 우리 아빠 죽인 놈 알아요?"

“몰라. 우리도 찾고 있고. 너 안방 써라.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하고.”

“전 윤지우예요. 아시겠지만.”

 

 

 남자, 아니 아저씨가 가리킨 방으로 들어가니 남자 혼자 살던 집임에도 깔끔하게 관리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따뜻한 집안에 들어오니 몸이 찝찝해 샤워를 하러 들어갔다. 뜨거운 물을 맞고 있다 보니 떠오르는 게 있었다. 언젠가 술에 취한 아빠가 정태주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아빠의 후배라고 했다. 나랑 닮아서 신경이 쓰인다고. 화를 내지도, 웃지도, 울지도 않는다고. 한 번도 대든 적도 없고 감정 표현이 서툰 건지, 무뎌진 건지 잘 모르겠지만 자꾸 신경이 쓰이는 후배라고. 그때까지만 해도 아빠가 남들처럼 평범한 직장에 다니는 줄로만 알았고, 아빠가 말하는 정태주도 평범한 후배인 줄만 알았다. 

 

 쓸데없는 상념에 사로잡혀 오랫동안 욕실에 있었더니 끊이지 않는 물소리가 불안했는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안 죽었어요, 하며 짧게 대답을 남기고 걸려있는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드레스룸에서 아무거나 꺼내입으라는 말에 묵직한 우드 향과 담배 냄새가 묘하게 섞인 맨투맨을 하나 꺼내 입었다. 이상하게도 마음이 안정되는 듯한 향에 오랜만에 깊게 잠든 밤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우리의 동거는 생각보다 순탄하게 흘러갔다. 집으로 돌아온 아저씨의 몸에서 묘한 피비린내가 나거나, 반팔을 입고 있으면 드러나는 상처와 흉터들이 아빠를 떠올리게 했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불편한 감정을 내비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고, 감성팔이는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 중 하나였으니까.

 

 그렇게 묘하게 서먹거리는 동거인으로 지낸 지 3년이 될 무렵, 늦어도 7시까지는 들어오던 아저씨가 연락도 없이 자정이 넘은 시각까지 들어오지 않은 날이 있었다. 걱정되는 마음에 늦은 시각이지만 집을 나섰다. 동네라도 한 바퀴 돌아보려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비상계단에서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어딘가 힘겨워 보이고 느릿하게 들려오는 그 소리는 아빠가 죽던 날을 상기시키기에 충분했다.

 

 급하게 고개를 든 내 시야에 들어오는 건, 피범벅이 된 아저씨였다. 그 모습을 마주하는 순간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의 마지막이 떠올라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곧 쓰러질듯한 걸음걸이로 내 앞까지 걸어온 아저씨는 피로 물든 손으로 떨리는 내 손을 잡아 왔다. 그 미약한 온기에 겨우 정신을 차린 나는 119에 전화했다. 제발 아저씨 좀 살려달라고 울던 기억, 들것에 실려가는 순간까지도 내 손을 놓지 않던 그 큰 손, 수술실로 들어가는 아저씨를 바라보던 기억, 그 모든 기억이 지독하게도 선명해서, 나는 또다시 깊은 수렁에 빠지고 말았다.

 

 한참을 자책의 굴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을 때, 수술실 문이 열렸다. 핏기 하나 없는 얼굴로 죽은 듯이 누워있는 아저씨를 보고 있자니 또 속절없이 눈물이 나왔다. 더는 나올 눈물조차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바보같이 또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고 또 혼자 상처받고 있었다. 자책의 늪에 완전히 잠겨버리기 직전, 아저씨는 겨우 의식을 회복했다. 아저씨가 일반 병실로 내려오고 걸을 수 있을 정도가 되기까지 나는 잠을 거의 자지 못했다. 아빠가 죽던 그날처럼.

 

 눈을 감으면 엄마가 떠올랐다. 그 뒤에는 아빠가 있었고 마지막으로는 피범벅이 된 아저씨가 나타났다. 그 악몽 속의 세 사람은 항상 내 앞에서 숨을 거뒀다. 끔찍하게도 고통스러웠고, 두려웠다. 그날도 여느 날처럼 잠이 오지 않았고, 잠든 아저씨를 깨우고 싶지 않아 병원 정원에 나와 앉아있었다. 낮부터 하늘이 어둑하다 싶더니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끔찍한 그날의 기억이 눈앞에 다시 한번 그려졌고, 눈이 어깨에 잔뜩 쌓일 때까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때, 머리에 쌓인 눈을 털어내는 손길이 느껴져 뒤를 돌아보니, 아저씨가 서 있었다. 우산도 없이 얇은 환자복 하나만 입고 있는 모습에 기겁하며 일어나자 아저씨의 얼굴에 묘한 웃음기가 서리는 것 같기도 했다. 

 

 

 

“아픈 사람이 여긴 왜 나왔어요. 추워요, 빨리 들어가요."

"그럼 애가 갑자기 사라졌는데 혼자 발 뻗고 자라고? 너 잊었나 본데 너 지키는 게 내 일이야."

"그 몸으로 누가 누굴 지켜요. 그리고 여기 씨씨티비가 몇 댄데."

"얼굴만 가리면 누가 누군지 어떻게 알아."

"오늘따라 왜 이러지? 다친 게 머리에요?"

"너 말을 해도..., 같이 들어가자고. 감기 걸려.“

 

 

 손을 잡아끄는 손길에 끌려가면서도 걱정되는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진짜 미친 거 아니야? 를 다섯 번쯤 외쳤을 때, 내 입을 틀어막는 아저씨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져 있어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러니까, 그 모습이 무서웠던 건 아니다. 학교에 다닐 적, 같은 반 애들이 남자 연예인을 보고 섹시하다고 외치던 심정이 이런 걸까 싶었다. 어쩌면 이건 동경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가족이 아닌 '남자 어른'은 처음이었고, 그 어른이 나를 지키려고 하는 것도 거의 처음이었으니까.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야, 내가 아저씨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엄청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 아저씨 생각이 떠오르고, 눈이 오는 날이면 엄마의 죽음이 아니라 머리 위로 놓이던 큰 손이 떠올랐고, 외로운 날이면 아저씨가 보고 싶었다. 이 집에 처음 온 날 느꼈던 그 포근함이 그리워 몰래 아저씨 침대에 누워있다가 잠든 적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으니까. 이건 단순한 동경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여느 날과 같이 출근하는 아저씨를 배웅하고 집에 혼자 있던 날이었다. 시간도 안 가고, 괜히 심심하게만 느껴지는 하루에, 책이나 읽을까 싶어 서재로 들어갔다. 책장으로 이루어진 한쪽 벽이나, 그 책장 안에 가득 꽂힌 책 따위를 한참 바라보다가 유난히 눈에 띄는 책 한 권을 발견했다. 얇은 시집이었다. 자주 읽는 책인지, 책장을 자주 넘긴 흔적이 가득했다. 이 집에서 유일하게 인간적인 물건이라고 생각하며 책장을 계속해서 넘겼다. 

 

 

화살 하나가 공중을 가르고 과녁에 박혀

전신을 떨 듯이

나는 나의 언어가 

바람 속을 뚫고 누군가의 가슴에 닿아

마구 떨리며 깊어졌으면 좋겠다

불씨처럼

아니 온몸의 사랑의 첫 발상처럼

 

 

 이건 사랑 시,

 

 

예쁘지 않은 것을 예쁘게 보아주는 것이 사랑이다 

좋지 않은 것을 좋게 생각해주는 것이 사랑이다

싫은 것도 잘 참아주면서 처음만 그런 게 아니라

나중까지 아주 나중까지 그렇게 하는 것이 사랑이다

 

 

 이것도 사랑 시.

 

 제법 감성적인 조폭이라는, 영양가 없는 생각을 하며 책장을 넘기고 있는데 책을 쑥 가져가는 손길이 느껴졌다. 

 

 

"윤지우. 술이나 한잔할래?" 

 

 

 하고 묻는 말에 그냥 그러자고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술을 마셔본 적이 없음에도, 짙은 우울이 온몸을 적시고 있는 듯한 그 모습을 보고 있자면 거절의 말은 나오지 않았다. 

 

 바보같이 고개를 끄덕일 때부터 예상했던 일이지만, 나는 금방 쓰러지고 말았다. 잠결에 들린 한숨 소리,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올려 주는 느낌, 그리고 낮은 목소리. 

 

 지우야, 나 좋아하지 마라. 

 

 그 소리가 너무나도 아득하게 들려와서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다만, 조금씩 아려오는 속보다 마음이 훨씬 더 아팠다. 몸을 들어 올리는 손길이 느껴지자 잠에서 완전히 깼음에도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곧 흐를 것 같은 눈물을 들키기가 싫었고, 따뜻하고 넓은 품이 마냥 좋아서. 시작도 못 해본 내 마음이 너무 불쌍해서. 

 

 나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척했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팠고, 속이 울렁거리는 것도 사실이라 멀쩡한 몰골로 아저씨를 마주할 수도 없었지만. 출근하는 아저씨를 배웅하고 한참을 잤을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한참 늦은 밤. 집 안에 인기척이 없는 걸 보니 아직도 퇴근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제 일이 아저씨에게도 불편한 기억이었을까 싶어 괜히 풀이 죽어 있는데 다시 한번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조금은 신경질적으로 문을 열었다. 

 

 누구세요, 그 네 음절을 다 발음하기도 전에 날카로운 고통이 느껴졌다. 차갑고 예리한 날붙이는 뱃속을 깊숙이 헤집었고, 그 이후로도 이곳저곳 내 몸을 찔러댔다. 눈앞이 흐려지고, 몸에 힘이 풀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든 생각은 아저씨가 지금은 집에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 내가 죽고 오더라도 상관이 없으니 이 위험에 빠지지 않았으면 하는 그런 생각. 

 

 다급하게 뛰어가는 운동화 소리, 온몸으로 느껴지는 차가운 현관 바닥과 겨울 공기, 점점 빨라지는, 가까워지는 구두 소리. 아득하게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익숙한 체향. 다급하게 상처를 누르는 손길, 볼을 쓰다듬는 떨리는 손. 그 순간 있는 힘을 다해서 말하고 싶었다. 사랑한다고, 내 마지막 기억이 아저씨라서 행복하다고, 나는 평생을 못 했던 일이지만 나에 대한 기억은 먼 바다에 던져버리고 행복하게 살아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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