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오는 아침
@김백만(kim3million)
※ 학원물 au / 시대 배경 대략 2000년대
동천고등학교의 아침은 유난히도 분주했다. 여느 학교들이 그렇듯 버스정류장과 교문까지의 사이에 길고 긴 아스팔트 길이 깔려 있었다. 교직원 외에는 차량 출입을 통제한다는 학칙에 따라 자연스럽게 자전거를 타는 학생들이 많았다. 깔깔거리고 웃으며 청춘을 뽐내는 아이들이 아침마다 반은 걷고 반은 자전거를 몰며 길고 긴 아스팔트 길 위를 지나쳐갔다. 게 중 가장 요란법석을 떠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늘 윤지우였다.
동천고등학교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쭉 직진하다 보면 큰 갈림길이 나왔다. 거기서 왼쪽으로 꺾으면 동천고등학교가, 오른쪽으로 꺾으면 동천중학교가 나왔다. 동천중학교를 졸업한 윤지우는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꺾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이 길을 또 걷게 될 줄이야. 잠깐의 감상에 젖을 시간도 없었다. 같은 버스를 타고 같은 시간에 등교를 했지만, 동천중보다 동천고가 더 멀리에 있었으므로 잰걸음으로 걸어도 시간이 부족했다. 어떻게든 지각만은 면하기 위해 윤지우는 걸음을 재촉했다.
딱 오 분만 빨리 나오면 될 텐데. 윤지우를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입을 모아 하는 말이었다. 허리까지 늘어지는 긴 머리는 항상 반쯤 젖어 헝클어진 상태였고, 흘러내리기 직전인 가방은 아슬아슬하게 땅에 닿지 않는 정도였다. 흰색 반팔 티셔츠 위로 걸치기만 한 셔츠는 단추가 모두 풀어헤쳐진 상태였고, 그 위로 걸쳐진 조끼는 심지어 단추가 하나 떨어져 없는 지경이었다. 제멋대로 삐져나온 넥타이는 말 그대로 목에 걸기만 한 채였다. 체육복 바지 위로 겹쳐 입은 치마는 비스듬히 비틀어져 있었고, 신발 또한 대충 구겨 신어 뒤축이 모두 꺾여 있었다. 화룡점정은 입지도 않고 어깨에 대강 둘러맨 교복 마이였다. 한 마디로 윤지우는, 완벽한 복장 불량이었다.
신발을 직직 끌며 겨우 교문 앞에 도착한 윤지우가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닫히기 직전인 교문 앞에서, 무릎에 손을 짚고 숨을 고르고 있는데, 그러니까 딱 그때에. 시야에 정갈한 운동화 한 켤레가 들어왔다. 그리고 그 위로 더 단정한 교복 바지가, 숨 막히게 깔끔한 교복 상의가 보였다. 초록색 명찰, 정태주. 그리고 시선의 끝에서야 마주한 얼굴은, 미간을 찌푸린 채로 윤지우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 몇 학년 몇 반 이름. "
" 네? "
그는 대답 대신 턱짓으로 체육복 바지를 가리켰다. 아아. 단박에 눈치챈 윤지우는 그와 마주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몸을 슬쩍 숙였다. 그의 눈썹이 꿈틀, 움직이는 게 다 보였다. 지우는 뻔뻔한 표정을 유지하며 치마 안에 껴입은 체육복 바지를 훌렁 벗어내렸다. 바닥으로 툭 떨어진 바지를 보며 그는 황당함에 얼굴을 구겼다. 지우가 체육복 바지를 완전히 벗기 위해 드러난 맨 다리를 움직이자, 정태주는 황급히 시선을 돌리며 헛기침을 했다. 정태주는 속으로 정말 골 때리는 애다, 하는 생각을 하며 민망함에 괜히 눈썹 가를 긁적였다. 주섬주섬 체육복 바지와 땅에 떨어진 마이를 주워든 윤지우는 방금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한 얼굴로 정태주를 빤히 바라봤다. 이제 됐죠? 하는 말을 하고는 대답도 듣지 않고, 붙잡을 새도 없이, 곧바로 교문을 넘어섰다. 그제야 시선을 돌려 멀어지는 작은 등을 본 정태주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첫 등장부터 요란한 게, 앞으로의 아침이 고달파질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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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주의 예감이 틀리지 않았다는 듯, 윤지우는 매일 비슷한 모양새로 등교했다. 정태주는 질린다는 듯이 눈을 살짝 감았다 뜨며 윤지우의 앞을 막아섰다. 체육복 바지만 빠졌지 어제와 거의 비슷한 행색이었다. 구겨신은 운동화, 뒤가 접힌 치마, 단추는 하나도 잠그지 않은 채로 제멋대로 튀어나와 있는 교복 셔츠, 브랜드 로고가 크게 그려진 반팔 티셔츠, 어깨에 제대로 걸쳐지지도 않은 조끼, 죽 늘어져 목에 걸려 있기만 한 넥타이, 역시나 걸치지도 못하고 팔에 걸려 있는 교복 마이, 느슨하게 걸린 어깨 끈 덕분에 바닥에 긴 끈 자락이 끌리고 있는 가방까지. 교복 셔츠 다림질까지 직접 하는 칼각 인생 정태주의 눈에 윤지우의 상태는 복장 불량 그 자체였다. 하지만 빠진 명찰 외에 구색은 모두 갖추고 있는 셈이었으니 부러 지적할 거리가 되지는 못했다. 선도부장 선생님이 보신다면 무어라 잔소리를 늘어놓을 정도는 되었으나, 일개 선도부인 정태주가 지적하기엔 좀 뭐랄까, 오버였다. 그래서 정태주는 하고 싶은 말들을 꾹 눌러 담은 채 딱 한 마디만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 명찰. "
" 아, 맞다. "
박 터지는 소리를 내며 눈을 맞춘 윤지우는 손만 뻗어 가방 속을 뒤적거렸다. 손끝의 감각에 집중하느라 초점이 나간 눈이 계속 제 얼굴 쪽을 향하고 있어서, 본의 아니게 정태주는 윤지우의 얼굴을 꼼꼼히도 살피게 되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를 흉터가 눈 바로 아래에 있었다. 얇은 실선 같은 흉터는 알아채기 전에는 눈에 띄지 않았다가, 알아챈 직후엔 존재감을 뽐내는 것이었다. 찰나의 몇 분이 아주 오랜 시간처럼 느리게 흘러갔다. 초봄의 찬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할퀴고 지나갔다. 윤지우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휘날리더니 몇 가닥이 볼가에 붙었다. 정태주는 저도 모르게 손끝을 움찔, 했다가 힘을 꽉 주어 멈췄다. 때마침 명찰을 찾아낸 윤지우가 요란하게 손을 뻗는 바람에, 정태주의 움찔 거린 손끝은 아무도 모르는 일이 되었다. 정태주 본인조차도.
" 이제 됐죠? "
명찰을 제대로 꽂지도 않고 대충 끼워놓는 윤지우의 작태에 정태주는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 이상 지적을 하는 건, 역시 오버였다. 흰색 명찰에 쓰인 이름 세 글자, '윤지우'를 되새기며 정태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멈춰 선 정태주의 곁을 윤지우가 비껴갔다. 은은하게 스치는 샴푸 향기에 정태주가 괜히 손가락으로 코끝을 문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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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우는 정말 여러모로 신경 쓰이는 애였다. 적어도 정태주의 입장에선 그랬다. 아침마다 늦잠을 자는 건지 늘 엉망진창인 상태로 등교하는 것도 그랬고, 빵이며 우유며 무엇이든 입에 물고 우물거리며 나타나는 것 또한 그랬다. 이 정도로 자주 걸리면 등교하기 전에 명찰을 챙길 법도 한데. 며칠째 이어진 명찰 찾기 대작전을 눈앞에서 구경하며 정태주는 속으로만 생각했다. 윤지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로 집중한 얼굴이 되어서는 또 가방에 손만 넣어서 휘적거리고 있는 중이었다. 입에 물린 빵이 떨어질 것 같아 정태주는 내심 불안했다. 하여튼. 여러모로 신경이 쓰인다.
" 차자따! "
입에 물린 빵 덕분에 윤지우의 발음이 줄줄 샜다. 정태주는 인상을 쓰지 않으려 애쓰며 그 꼴을 가만히 관망했다. 뭐가 좋은지 윤지우는 명찰을 가슴팍에 대충 끼워놓고는 정태주를 보며 아주 뿌듯하게 웃었다. 마치 자랑을 하듯이 정태주에게 웃어 보이느라 윤지우는 반쯤 열린 가방 지퍼는 닫지도 않은 채로 교문을 넘었다. 정태주는 멀어지는 작은 등을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정말로.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는 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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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우의 손에는 매번 다른 종류의 것들이 들려 있었는데, 그중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바로 초코우유였다. 어느 날은 양손에 하나씩 쥐고 오며 두 개를 모두 먹는 모습을 보였는데, 단 것을, 특히 초코를 싫어하는 정태주의 입장에선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질 일이었다. 달랑달랑 떨어지기 직전인 명찰을 달고서 당당하게 교문을 넘는 윤지우를 보며 정태주는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진짜 골 때리는 애다.
처음부터 윤지우를 관찰하려던 건 아니었다. 골 때리는 애, 신경 쓰이는 애, 늘 엉망진창인 애. 딱 그 정도의 감상으로 끝나던 일의 꼬리가 점점 길어졌다. 눈가에 옅은 흉터가, 은은하게 나부끼는 샴푸의 향기가, 꺾어신은 운동화 덕분에 직직 끌리는 걸음걸이가, 명찰을 찾을 때면 보이는 집중한 얼굴이, 자꾸만 정태주를 그렇게 만들었다. 여기엔 어느 정도 윤지우의 책임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굳이 제 앞에 와서 명찰을 찾겠노라 가방 속에 손을 집어넣고 시간을 끄는 것이 그랬다. 걸리지 않으면 그냥 들어갈 요량으로 그러는 것인지, 매번 걸릴 것을 알면서도 굳이 저를 골탕 먹이기 위해 시간을 끄는 것인지, 윤지우의 속내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게 다 정태주의 마음을 건드린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러니까 삼학년 정태주가 일학년 윤지우를 짝사랑하게 되는 것이 그리 놀랄 일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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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날과 같이 명찰 찾기 대작전이 실행되는 중이었다. 정태주는 윤지우의 손에 들린 우유갑이 바닥으로 추락할까 조마조마했고, 윤지우는 그날따라 유난히도 손에 걸리지 않는 명찰 때문에 서서히 미간이 좁혀지고 있는 중이었다. 아씨, 작게 읊조린 윤지우가 벗어낸 가방을 휙 뒤집어엎은 건 정말이지 순식간이었다. 정태주가 말리기도 전에, 아니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에 일이 벌어졌다. 윤지우의 가방 속에 들어 있던 것들이 한꺼번에 바닥으로 쏟아져내렸다. 윤지우는 그 속에서 명찰만 쏙 빼들더니 가슴팍에 대충 끼워 넣었다. 바닥에 떨어진 것들을 손으로 쓸어 가방 속으로 대강 밀어 넣으며 윤지우는 고개를 치켜들며 눈짓을 했다. 이제 됐죠, 뭐, 이런 뜻을 담아서. 황당함에 어이가 가출한 정태주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한발 물러섰다.
윤지우가 소지품을 정리하는 동안 정태주는 데구르르 굴러간 연필 한 자루를 주웠다. 윤지우의 가방 속으로 사라지는 물건들은 정말이지 그와 어울리지 않는 것들 투성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정태주의 입장에선 그렇게 보였다. 조그만 필통은 지퍼가 반밖에 안 닫혀 있었고, 노트랍시고 들어 있는 건 얼마나 험하게 다뤘는지 표지가 너덜너덜했다. 그리고 그다음이 압권이었는데, 반쯤 풀어진 붕대와 마우스피스가 있었다. 투명한 케이스에 담겨 있었던 터라 자세히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정태주가 집어 든 연필을 건네며 의아한 눈길을 보내자 윤지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 아, 모르시는구나. 저 권투 선순데. 무려 최연소 국가대표! 완전 멋있죠? "
" ... 권투? "
" 네. 나름 유명한데. "
" ... 그런 쪽엔 관심이 없어서. "
" 그럴 거 같았어요. "
어깨를 으쓱해 보인 윤지우는 정태주의 손에 들린 연필을 가볍게 받아 들고는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더니 곧장 교문을 넘어섰다. 정태주는 또 멀어지는 등을 보며 윤지우의 말을 곱씹었다. 그럼 아침마다 늦잠 자는 게 아니라, 체육관에 다녀와서 그런 거였나. 눈가의 흉터도 그래서. 자연스럽게 짜 맞춰지는 퍼즐에 어쩐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운동하는 윤지우라. 새삼 신기하긴 했다. 학교에선 늘 잠만 잘 거 같이 생겼는데. 평소에 하고 다니는 거 보면 (비록 아침 등굣길에서만 마주하는 얼굴이지만) 운동선수 같아 보이지도 않았는데. 신기하네. 윤지우를 향한 감상이 하나 더 추가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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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주의 예상대로 윤지우는 학교에선 잠만 자는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단 한 번도, 스쳐 지나가지도 않을 리는 없었다. 아침 등굣길에 딱 3분. 제 앞에 서서 명찰을 찾아 가방을 뒤적거리는 윤지우는 그 아침 딱 3분만 볼 수 있었다. 그러니 정태주가 자연스럽게 아침을 기다리게 되는 건 당연했다. 평소엔 걷는 게 귀찮아 교실 밖으로는 나가는 일이 없던 정태주가 쉬는 시간만 됐다 하면, 점심만 먹고 나면 부지런히 발을 옮겨 온 교정을 거니는데도 윤지우는 털끝 하나 보이질 않았다. 그렇다고 1학년 건물을 기웃거릴 수도 없어서, 정태주는 어쩔 수 없이 별로 좋아하지도 않던 아침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럼 윤지우는 기대에 부흥이라도 하듯이 늘 무언가를 하나씩 빠트리고 나타났다. 주로 명찰과 넥타이가 문제였는데, 어느 날의 정태주는 그런 윤지우를 보다가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다. 일부러 이러는 건가? 잠시 스쳐간 생각이 제가 보기에도 너무 어이가 없어 허, 하고 바람이 빠지듯 웃음에 가까운 헛숨이 새어 나왔다. 정태주와 눈을 맞추며 넥타이를 목에 걸던 윤지우가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정태주는 그 얼굴을 뚫어져라 보다가, 저도 모르게 휙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어쩐지 그 얼굴을, 그 말간 눈동자를, 빤히 보고 있기가 어려워졌다.
심장이 쿵쾅쿵쾅 거세게 뛰는 걸 느끼며 정태주는 아연히 생각에 잠겼다. 아, 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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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은 초코우유를 물고 나타난 윤지우가 기세등등한 얼굴로 정태주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공중에 흩날리는 긴 머리에선 은은하게 샴푸 향이 났고, 제 곁을 지나기 직전엔 초코우유의 단내가 났다. 윤지우의 미묘하게 올라가 있는 입꼬리는, 정태주의 눈에는 확실히 보이는 종류의 것이었다. 어쩐 일로 제법 단정한 차림새의 윤지우가 지나가고, 정태주는 한동안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다 고개를 푹 숙였다. 초등학생도 아니고 참. 홧홧하게 달아오른 뒷덜미가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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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늘했던 날씨가 포근하게 바뀌고, 그 포근하던 날씨가 이젠 덥게 느껴지기 시작하던 때였다. 이제는 거의 습관처럼 윤지우가 나타나길 바라며 교정을 돌던 정태주는 갑갑한 마음에 옥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옥상은 안전상의 이유로 대부분 잠겨 있었는데,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 하는 아이들 특유의 반항심이 모여 운 좋게도 열려 있는 날이 있곤 했다. 굳이 제 손으로 열고 들어가고 싶을 만큼 간절하진 않아서 정태주는 아주 가끔 가는 장소였다.
문은 닫혀 있었지만 잠금장치는 열려 있었다. 오늘은 운이 좋네. 단순한 감상을 남기며 문을 열어젖히려는데, 손잡이를 잡은 정태주의 귓가에 안에서부터 웅성거리는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귀찮은 일에 휘말리는 건 딱 질색이라 손잡이를 그대로 놓고 돌아서려는데, 살짝 열린 문틈으로 목소리 하나가 날아들었다. 몇 번 들은 적도 없는 목소리인데도 불구하고 어쩐지 강한 확신이 들었다. 정태주는 망설이지 않고 손잡이를 붙잡아 돌려 무거운 철제 문을 단번에 열어젖혔다.
요란한 문의 소음과 함께 나타난 정태주를 보고 옥상에 있던 모든 이들이 얼어붙었다. 문을 열기 직전 정태주가 상상한 장면은 여러 명의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맞기 직전인 윤지우, 정도의 최악이었으나 막상 문을 열고 마주한 현실은, 최악인지 아닌지 조금 헷갈렸다. 주먹을 뻗은 윤지우는 그대로 멈춰 서서 고개만 돌려 정태주를 바라보았고, 바닥에 주저앉은 아이는 놀란 눈으로 정태주를 올려다보았다. 곁에 선 아이들은 마치 한 덩어리처럼 모여 서서 정태주를 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건 지금, 누가 봐도 윤지우가 가해자였다.
" ... 안 가냐? "
정태주가 묻자 굳어 있던 아이들이 그제야 화들짝 놀라며 부리나케 움직여 옥상을 벗어났다. 가만히 멈춰 선 윤지우는 어쩐지 잘못을 들킨 어린아이 같은 얼굴을 했다. 정태주는 부러 그럴 필요가 없음에도, 괜히 저도 윤지우에게 좋은 핑곗거리가 되어주기로 했다. 교복 마이 안주머니에 넣어둔 담배갑을 꺼내든 건 다 그 때문이었다.
" 아직 한 대도 안 때렸어요. "
" 아직? 그럼 때리긴 할 거였나 보네. "
" 아니에요 그냥 겁만 준 거예요. 쟤네가 자꾸 귀찮게 해서. "
핑계처럼 덧붙는 말에 피식 웃은 정태주가 능숙한 폼으로 라이터를 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윤지우의 눈이 반짝거리는 게 보여 자꾸만 웃음이 샐 것 같아 입꼬리에 힘을 주어 참았다.
" 선도부가 그래도 되는 거예요? 것도 학교 안에서? "
똘망 똘망 한 얼굴이 좋은 건수를 잡았다는 것처럼 속이 훤히 내다보였다. 정태주는 깊게 빨아들인 담배를 입에서 빼내며 연기를 훅 뱉는 것으로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감추었다. 귀찮은 일은 만들지 않는 게 신조인 정태주가 저 때문에 부러 이런 귀찮은 일에 뛰어든 사실을, 윤지우는 아마 내도록 모를 터였다.
" 난 별로 상관없는데. 넌 상관있지 않나? "
국가대표라고 하지 않았나 저번에? 하고 흘리듯 이어지는 정태주의 말에 윤지우가 입술을 꾹 말아 물었다. 얼마 가지 않아 발끈 한 윤지우는 참지 못하고 아직 안 때렸다고요. 하고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 말했다. 담배를 물며 슬슬 웃는 정태주를 보고 윤지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 ... 그래도 걸리면 좆 되는 거 아니에요? "
" 그건 피차 마찬가지 아닌가. "
" 비밀로 해줄게요. 그러니까 그쪽도, "
" 정태주. "
" ... "
" 내 이름 정태주라고. "
" ... 아는데요. 모르면 바보 아닌가. 아침마다 보는데. "
아침마다 보는데도 네가 또 보고 싶었다는, 그런 간지러운 말이 제멋대로 튀어나갈까 봐 정태주는 대답 대신 다시 담배를 물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삐딱하게 선 윤지우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비뚜름하게 정태주를 보다가 눈이 마주치자 몸을 휙 돌려 주변을 살피는 척을 했다. 정태주의 눈에 윤지우는 내려갈 타이밍을 잡지 못해 어색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정태주는 담배연기를 내뱉으며 윤지우의 옆얼굴을 슬쩍 훔쳐보았다. 바람이 불어 머리카락이 휘날리자 윤지우가 손끝으로 그것을 대강 쓸어넘겼다.
" 비밀로 해줄게. "
" 뭐 피차 마찬가지니까, 감사 인사는 안 할게요. "
" 대신 조건이 있어. "
" 치사하게 무슨. ... 뭔데요. "
" ... 명찰 좀 잘 챙겨. "
" 허, "
어이가 없다는 듯이 바람 빠진 소리를 낸 윤지우가 무어라 말을 덧붙이려는데, 타이밍 좋게도 점심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일학년 교실이 더 멀리에 있었으므로 윤지우는 지금 당장 튀어 나가 최선을 다해 뛰어야만 제시간에 제 자리에 앉을 수 있을 것이었다. 아씨, 내일 다시 얘기해요! 윤지우는 제 할 말만 바쁘게 내뱉고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옥상을 뛰쳐나갔다. 남겨진 정태주는 그제야 입꼬리를 끌어당겨 편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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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의 에피소드 덕분인지 정태주는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잠에서 깨어났다. 슬쩍 뜬 눈으로 시간을 확인한 정태주가 느릿느릿 몸을 일으켰다. 상체를 일으켜 앉고도 한참이나 멍하니 있던 정태주는 마른 세수를 하며 터져 나오는 헛웃음을 삼켰다. 윤지우의 내일 다시 얘기해요, 하는 한 마디 때문에 누구보다 빠른 아침을 맞이하고 있는 제 자신이 너무나도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이런 게 짝사랑인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으니 뭐가 맞고 뭐가 틀린 지는 알 수 없었다.
평소보다 더 느리게, 더 꼼꼼하게, 더 차분하게 준비를 마쳤지만 그래도 너무 이른 시간인 건 확실했다. 정해진 시간보다 일찍 간다고 해서 돌아오는 이득은 하나도 없었다. 아직 초여름이라 해도 아침의 햇살은 무척이나 따가웠으므로, 더 오랜 시간 서 있지 않으려면 최대한 제시간에 맞춰 가는 것이 상책이었다. 하지만 이미 이른 아침을 맞이한 정태주는 결국 참지 못하고 학교로 발걸음을 옮겼다. 언젠가부터 늘 윤지우의 등교를 기다리는 게 습관이 되어버렸지만, 오늘은 어쩐지 기분이 남달랐다. 그게 다 윤지우 때문이라는 걸 알면서도 의연한 척, 신경 쓰지 않는 척하려 애썼다. 의식하면 할수록 심장이 제멋대로 날뛰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다르게 윤지우는 아침나절 내내 모습을 보이질 않았다. 조금만 더 늦으면 지각인데. 늘 아슬아슬한 시간에 겨우 세이프 하는 윤지우를 알기에 정태주는 가만히 마음을 토닥였다. 하지만 윤지우는 여전히 등장하질 않았고 시간은 정태주의 마음도 모르고 제멋대로 가버렸다. 결국 아침 선도가 끝날 때까지 윤지우는 머리카락 한 올도 보이질 않았다. 윤지우가 아침에 만나자고 한 것도 아닌데, 묘하게 퍼지는 실망감에 정태주는 조용히 어금니를 깨물었다. 무슨 사정이 있겠지. 뒤늦은 걱정은 핑계와도 같았다.
어딘가 허한 마음에 수업은 내도록 집중이 되질 않았다. 입맛도 별로 없고. 점심시간을 울리는 종소리에 너 나 할 것 없이 튀어나가는 아이들을 보며 정태주는 가만히 앉아 쓴 입맛만 다셨다. 옥상에 올라가 담배를 한 대 피우고 내려올지, 후미진 체육 창고에 조용히 누워 낮잠을 잘 것인지 잠시간 고민했다. 한낮의 태양은 뜨거울 테고 그늘진 체육관은 서늘할 것이었다. 정태주는 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축이는 걸로 대신하며 발걸음을 돌렸다. 가라앉은 기분은 자고 일어나면 조금 나아질 것이었으니.
느릿한 걸음으로 정태주가 체육관으로 향할 때, 윤지우는 빠른 걸음으로 옥상으로 향하고 있었다. 정태주가 생각한 내일은 아침이었지만, 윤지우가 생각한 내일은 같은 장소 같은 시간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점심시간의 옥상을. 내리쬐는 햇볕은 따가울 지경이었다. 그 좋아하는 급식도 거르고 올라온 윤지우는 실망감에 미간을 확 찌푸렸다. 삼학년 교실이 더 가까우니까, 당연히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휑하니 비어 있는 옥상을 멍하니 보다가 윤지우는 구석으로 가 좁은 그늘에 털썩 주저앉았다. 기다리면 금방 오겠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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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정태주는, 체육관 구석에 자리한 창고에 매트를 두 개 겹쳐 깔고 누워 다디단 낮잠을 자고 일어났다. 아침에 너무 이르게 일어난 탓인지, 잠깐 자고 일어난다는 게 점심시간을 거의 다 흘려보내고 말았다. 손목에 걸린 시계를 확인한 정태주는 멍한 정신을 일깨우다 불현듯 스치는 생각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생각을 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쿵쿵 거리며 뛰기 시작한 심장은 옥상으로 달려가는 동안 더욱 거세게 박동했다. 윤지우가 저를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알 수 없는 확신이 머리를 어지럽게 했다.
계단을 두 칸씩 뛰어 옥상까지 단숨에 올라온 정태주는 헐떡이는 숨을 채 고를 생각도 하지 못하고 무겁게 닫힌 철제 문을 열어젖혔다. 옥상 안으로 쏟아지듯 들어선 정태주는 놀라 동작을 멈추었다. 난간에 걸터앉은 윤지우는 허공에 발을 달랑거리며 기지개를 켜는 중이었다. 윤지우 역시 놀라 도중에 동작을 멈추었다. 두 사람 사이에 시간이 멈춘 듯 찰나가 아주 느리게 흘러갔다. 먼저 반응을 보인 건, 역시 윤지우였다.
" 풉. "
" ... 너 뭐야? "
" 뛰어왔어요? 여기까지? "
" 너 뭐냐고. "
윤지우는 대답은 하지 않고 그저 웃기만 했다. 얼굴을 찌푸린 정태주가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서자 윤지우는 가볍게 뛰어 아래로 내려왔다. 나란히 선 두 사람은 비스듬한 시선을 마주했다. 윤지우는 여전히 웃고 있었고, 정태주는 여전히 인상을 쓴 채였다.
" 내일 다시 얘기하자고 했잖아요. "
" ... 그래서, "
" 그래서 기다렸죠. 점심도 못 먹고. "
윤지우의 산뜻한 태도에 오히려 당황한 건 정태주였다. 차라리 화를 내면 쉬울 텐데. 웃고 있는 윤지우는 어쩐지 상대하기가 어려웠다. 정태주가 대답을 하지 못하고 시선을 피하자 윤지우가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섰다.
" 내가 다시 얘기하자고 했잖아요. "
" ... 나는, "
" 미안하죠? "
" ... "
" 그럼 초코우유 사주세요. "
윤지우는 뻔뻔한 낯으로 웃으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야, 좀. 정태주는 상체를 뒤로 물리며 피했다. 뛰어온 저에게서 땀 냄새라도 날까 걱정이 되었다. 윤지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웃으며 대답을 종용했다. 결국 정태주는 뒤로 주춤 물러서며 고개를 끄덕였다.
-
점심시간이 끝나기 직전의 매점은 무척이나 한산했다. 정태주가 초코우유를 계산하는 동안 윤지우는 매점 구석의 테이블에 볼을 대고 엎드렸다. 내내 그늘 한 점 없는 옥상에서 햇빛을 받느라 따끈하게 열이 올랐던 볼이 차가운 테이블에 닿자 기분 좋게 식어갔다. 저벅저벅 발소리를 내며 다가온 정태주가 맞은편에 있는 의자를 드르륵 끌어내어 앉으며 윤지우의 눈앞에 초코우유를 내려놨다. 반짝반짝 눈을 빛낸 윤지우는 단숨에 몸을 일으켜 우유갑의 입구를 뜯었다.
" ... 무슨 맛으로 먹냐. "
" 이게 제일 맛있는데. "
" ... "
" 초코가 제일 맛있어요. 딸기는 너무 달고, 바나나는 느끼해. "
" 초코가 더 달지 않나. "
" 그거랑 이거랑은 다르거든요? "
" ... 그래. 많이 먹어라. "
" 아직도 미안하죠? "
" ... 아침에 안 보이던데. "
" 말 돌리는 것 봐. 하나 더 사주면 얘기해 주지. "
" 별로 안 궁금한데. "
" 아, 쫌. 걍 사주면 안 돼요? "
" 나한테 초코우유 맡겨놨냐? "
" 치사하네. "
" 야, "
" 어! 종 친다. 잘 마실게요. 내일 봐요! "
개구지게 웃은 윤지우는 또 제 할 말만 하고는 가버렸다. 남겨진 정태주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터뜨렸고, 윤지우와 세 마디 이상의 대화를 나눴다는 사실을 되새기며 웃었고, 그걸 곱씹으며 웃고 있는 제 자신이 어이가 없어서 또 웃었다.
-
다음날,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자 정태주는 가장 먼저 교실을 벗어났다. 너 나 할 것 없이 급식실로 뛰어가는 무리들 사이를 역으로 걸으며 정태주는 매점으로 향했다. 윤지우는 콕 집어 특정 브랜드의 초코우유를 요구했다. 정태주는 그것을 집어 들어 계산을 마치고는 곧장 옥상으로 향했다. 아침 등굣길의 윤지우는 어제 약속 잊지 않았죠? 하는 말로 오늘의 만남을 확실하게 만들어주었다. 윤지우는 또 제 할 말만 하고 가버렸기 때문에 정태주는 곧바로 대답을 돌려주진 못 했지만, 손에 들린 초코우유를 내려다보며 이걸로 대신하는 셈 치면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두 사람의 옥상 데이트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정태주가 급식을 먹고 매점에 들러 초코우유를 사들고 옥상에 올라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윤지우가 요란하게 문을 열어젖히며 등장했다. 윤지우는 난간에 올려진 초코우유를 뜯어 벌컥벌컥 마시고 씩 웃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난간에 걸터 앉은 윤지우는 바람을 맞으며 허밍을 했고, 난간 아래로 생긴 작은 그늘 틈 사이에 주저앉은 정태주는 담배를 피우곤 했다. 두 사람은 별달리 이야기를 주고받지 않아도 늘 비슷한 시간에 만나 비슷한 태로 시간을 흘려보냈다. 콕 집어 이야기하지 않아도 두 사람은 주고받는 눈빛과 시간 속에서 비슷한 종류의 외로움을 읽었다. 정태주의 마음은 이미 윤지우에게로 쏟아지고 있는 중이었지만, 윤지우의 마음도 그와 엇비슷하게 기울고 있다는 걸 정태주는 아주 뒤늦게야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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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방학을 얼마 남기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이제는 제법 단정히 교복을 입고 등교하던 윤지우가, 늘 비슷하게 오던 시간이 넘었는데도 모습을 보이질 않았다. 오늘은 월요일이었고, 그러므로 정태주는 주말 내내 아침만을 기다려왔던 터였다. '가령 오후 4시에 네가 온다면, 나는 3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라고 말하던 책 속의 어느 이야기처럼, 정태주는 아침부터 두근거리던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윤지우와 친분을 쌓고 조금씩 더 가까워지자 심장은 진정하기를 포기한 것처럼 미친 듯이 널을 뛰곤 했다.
한데 시간이 지나서도 윤지우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설렘은 불안으로 번졌다. 단순하게 지각을 하는 거라면 상관이 없겠지만, 저번 옥상에서의 사건 이후로 정태주는 묘하게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윤지우가 운동을 하는 애라는 걸 핑계 삼아 묘하게 괴롭히기 시작한 아이들이 있다는걸, 다른 이도 아닌 정태주가 모를 리 없었다. 그렇기에 종종 윤지우의 안위를 걱정하게 되었다. 물론 윤지우는 스스로 제 몸 하나는 건사할 수 있을 만큼 훌륭한 실력을 가진 프로 운동선수였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걱정이 되는 면도 있었다. 정태주가 농담처럼 건넸던 말이 실제로 일어나는 최악의 경우가 생길까 봐. 여태껏 봐 온 윤지우는 대체로 인내심이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정태주가 윤지우와 이야기를 나누고 시간을 함께 보낼 만큼 친해지긴 했지만,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옥상은 늘 둘만의 공간이었고, 아침 등굣길에는 가볍게 주고받는 눈인사나 윤지우가 일방적으로 쏟아내고 지나가버리는 짧은 몇 마디가 다였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남들 앞에서는 아는 척을 하지 않는 암묵적인 규칙이 생겼다. 비밀 연애 같은 거에 왜들 열광하나 했는데, 자신이 직접 겪어보니 정태주는 되도록 오랫동안 아무도 몰랐으면 하는 생각을 하는 제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전화번호라도 물어볼걸. 매일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점심시간에 만나왔기 때문에 굳이 전화번호 같은 걸 물어봐야 한다는 생각조차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윤지우와 문자를 주고받고 통화를 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간지러운 일이었다. 윤지우가 저와 같은 마음일 리 없다고 생각하는 정태주의 입장에선, 점심시간의 만남은 윤지우에게 일종의 도피라고 생각했다. 난간에 걸터 앉아 살랑살랑 부는 바람을 맞으며 알 수 없는 노래를 흥얼거리는 윤지우를 보고 있노라면 그런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그 순간의 윤지우는 몹시 편안한 표정을 하고 있었으니까. 지난한 삶에 여유를 갖는 찰나의 순간을 제가 훔쳐보고 있다고, 정태주는 그렇게 제멋대로 생각했다.
어느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고. 쉬는 시간이면 괜히 복도를 어슬렁거리던 정태주는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점심시간을 맞이했다. 정태주는 일부러 가장 늦게 급식을 먹으러 갔다. 일학년이 급식을 먹는 시간에 맞춰서. 혹시라도 여기서 윤지우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을 담아서였다. 식판을 들고 아무리 기웃거려도, 밥을 코로 먹는지 입으로 먹는지도 모르게 식사를 하면서도 자꾸만 주변을 힐끗거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윤지우는 나타나지 않았고, 정태주는 습관처럼 매점으로 향했다. 학교도 오지 않은 윤지우가 옥상에 나타날 리 만무했지만 어쩐지 기다려야 할 것 같단 느낌이 들어서였다. 첫날 윤지우를 아주 오래 기다리게 만든 죄로, 정태주는 이런 상황이면 속절없이 윤지우를 기다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
난간에 초코우유를 올려둔 정태주는 입술을 꾹 말아 물었다. 그리곤 손목의 시계를 한 번, 굳게 닫힌 옥상의 철문을 한 번, 다시 난간에 올려둔 초코우유를 한 번 바라보았다. 윤지우가 늘 앉아 있던 난간에 걸터앉아 가만히 눈을 감았다. 햇빛이 따갑지도 않은지 윤지우는 매번 이렇게 난간에 걸터앉아 있곤 했는데, 막상 제가 앉아보니 왜 늘 이 자리를 고집하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사방이 뻥 뚫린 하늘은 쾌청했고 옅게 부는 바람은 부드러웠다.
비스듬히 짚고 있던 손을 움직이다 툭, 옆에 내려뒀던 초코우유를 건드렸다. 정태주는 그것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약간의 후회를 했다. 정태주는 입에도 대질 않는 초코우유를, 오지도 않은 윤지우를 위해서 샀다. 뜯지도 않은 새것을 버리기엔 아까웠고, 그렇다고 이 더운 날씨에 우유를 그냥 두기도 꺼림칙했으며, 또 그렇다고 자신이 마시기엔 영 내키질 않았다.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는 와중에,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가 들렸다. 쿵쿵 내딛는 발걸음이 다급하고 거칠었다. 소리만 들어도 요란한 등장이라 정태주는 문이 열리기도 전에 이미 웃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 정태주! "
아니나 다를까 거칠게 문을 열어젖히고 요란하게 등장한 건 윤지우였다. 슬쩍 웃음이 나려던 정태주는 윤지우의 얼굴을 보자마자 단박에 인상을 썼다. 헝클어진 머리, 터진 입가, 빨갛게 부어오른 눈두덩, 평소보다 빵빵해진 볼까지. 누가 봐도 어디로 봐도 방금 막 싸움을 하고 온 태였다. 뛰어온 윤지우가 달린 호흡을 가라앉히기 위해 헐떡거리는 동안 난간에서 훌쩍 뛰어내린 정태주가 단숨에 그 앞에 섰다. 이제 보니 윤지우는 얼마나 급하게 나온 건지 복장도 엉망이었다. 윤지우 앞에 멈춰 선 정태주가 윤지우와 눈이 마주치고, 입이 열리면, 동시에 말소리가 튀어나왔다.
" 선배 초코우유 안 먹잖아요. "
" 너 얼굴이 왜 그래? "
두 사람은 동시에 미간을 찌푸렸다. 서로 묻기만 하고 대답은 하질 않았다. 다시 질문을 던진 건 역시 굴하지 않는 윤지우였다.
" 저거 내 거예요? "
" ... 얼굴 왜 그러냐고. "
평소라면 윤지우의 말에 먼저 대답을 해줬겠지만, 지금 정태주는 심기가 몹시 불편한 상태였다. 윤지우가 운동선수인 건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얼굴이 이렇게 엉망으로 터져서 오지는 않았다. 간혹 손등에 생채기가 생겨 있거나 손목에 붕대가 감겨 있는 것. 혹은 부는 바람 사이로 옅게 나는 독한 파스 냄새 같은 걸로 단지 추측할 뿐이었다.
두 사람이 각자의 대답을 종용하며 알 수 없는 기싸움을 하는 동안, 점심시간이 끝남을 알리는 종소리가 우렁차게도 울렸다. 늘 그렇듯 윤지우가 먼저 달려나가는 것으로 상황이 종료될 것이라 예상했지만, 정태주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윤지우는 눈에 힘을 잔뜩 주고는 가만히 서서 정태주를 노려봤다. 알 수 없는 고집을 부리던 두 사람의 대치는 종소리가 끝날 때까지 이어졌다. 결국 작게 한숨을 내쉰 정태주가 먼저 시선을 피하며 몸을 돌렸다. 난간 위에 올려 두었던 초코우유를 집어 들어 윤지우의 손에 쥐여주었다. 마치 이걸로 대답이 되었냐, 하는 듯한 뉘앙스의 눈빛을 한 번 보내고는, 미련도 없이 발걸음을 돌려 옥상을 빠져나왔다. 아무리 수업을 대충 듣는 날치기 고삼이라지만 아예 빼먹을 수는 없었다.
남겨진 윤지우는 손에 들린 초코우유를 한 번, 정태주가 나가고 자연스럽게 닫힌 옥상의 문을 한 번 보며 이 상황을 이해하려 애썼다. 그러다 불현듯, 아, 종 쳤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자 멈춰있던 몸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날쌔게 움직였다. 정신없이 계단을 세 칸씩 뛰어내려가면서도 윤지우는 정태주를 생각했다. 평소 정태주는 우유는 입에도 안 댔고, 초코 라면 질색을 하는 편이었으며, 옥상에 올 때는 늘 담배를 피우곤 했다.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해 봤을 때, 정태주는 윤지우를 기다렸다는 합리적인 결론이 도출되었다. 복도 끝을 돌아 교실 방향으로 걸어오는 선생님을 발견한 윤지우가 아슬아슬하게 교실 문턱을 넘으며 씨익 웃었다. 터진 입가가 쓰라렸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 윤지우, 세잎- 그렇게 좋냐? 입 찢어진다. 친구들의 타박에도 윤지우는 개의치 않고 슬슬 웃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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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우는 터진 입가를 핑계 삼아 오후 수업을 쨌다. 원래도 수업을 열심히 듣는 학생은 아니었고, 적당한 핑계가 있었으니 선생님도 대강 손짓으로 나가도 좋단 뜻을 전했다. 정태주에게서 받은 초코우유를 몰래 챙겨 나온 윤지우는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지나쳐 건물 밖으로 나왔다. 뒤뜰을 가로질러 걸으며 우유갑의 입구를 뜯었다. 빨대를 퐁당 던져 넣고는 입구를 다시 닫으며 주변을 살폈다. 입에 문 초코우유를 천천히 빨아 마시며 체육관 쪽으로 걸었다. 적당히 부는 바람, 달콤한 초코우유, 수업 시간이라 몹시도 조용한 교정. 빨대를 물어 터진 입가가 쓰라렸지만 아랑곳하지 않을 만큼 기분이 좋았다. 체육관을 돌아 구석으로 가면 소각장이 나왔다. 거기다 쓰레기를 버리고 갈 셈으로 윤지우는 천천히 걸었다.
그러니까 이런 걸, 운명이라고 하던가? 우뚝 멈춰 선 윤지우는 입에 문 빨대를 뺄 생각도 하지 못하고 크게 뜬 눈만 꿈뻑거렸다. 윤지우는 체육관 앞을 지나려던 참이었고, 정태주는 체육관 문을 열고 나온 참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정태주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얼굴은 엉망진창인 주제에 그놈의 초코우유를 곧 죽어도 입에 물고 있는 윤지우 때문에 저절로 웃음이 났다. 그런 정태주를 보며 입술을 오물거린 윤지우가 어느새 다 먹은 우유갑에서 요란하게 빈 소리를 냈다. 그제야 머쓱하게 빨대를 뱉어낸 윤지우가 정태주를 향해 잘 먹었어요, 하고 중얼거렸다. 정태주는 고개를 까딱해 보이더니 말없이 윤지우의 곁을 지나쳐갔다. 아니, 지나쳐가려고 했다. 윤지우는 정태주의 소맷자락을 붙잡아 당겼다. 미약한 힘이었지만 정태주는 자연스럽게 끌려와 윤지우의 앞에 섰다.
" 오늘 대회 있었어요. "
" ... "
" 저 이겼어요. "
" 축하해. "
" ... 그니까 저 싸움한 거 아니에요. 아니, 그게 싸움은 맞는데, 어쨌든 시합 때문에, "
윤지우는 묻지도 않은 말을 중얼중얼 내뱉으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아씨, 이게 아닌데. 윤지우가 신경질적으로 정태주의 소맷자락을 놓고는 몸을 반쯤 틀어 서더니 제 머리통을 퍽퍽 내려쳤다. 정태주는 슬슬 새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윤지우의 손목을 붙잡아 내렸다. 동그랗게 뜨인 눈이 제게로 쏟아질 것처럼 커졌다. 정태주가 느린 손길로 붙잡았던 윤지우의 손목을 놓아주고는, 그 손을 그대로 들어 부어오른 볼을 손끝으로 살살 쓸어보았다.
" 아프겠다. "
혼잣말인 것처럼 내뱉은 정태주의 말은 윤지우에게 하는 질문 같기도 했다. 지척에서 보이는 정태주의 얼굴이 너무나도 가까워서 윤지우는 저도 모르게 흡, 숨을 들이마시고는 슬쩍 뒤로 물러섰다. 홧홧하게 달아오르기 시작한 얼굴이 금방이라도 새빨개질 것 같아 마주쳤던 시선을 은근하게 피했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 이미 반쯤 쓴 연고와 구깃 해진 밴드를 꺼내보았다.
" 이거, 있어서 ... 괜찮아요. "
윤지우가 물러선 만큼 벌어졌던 거리가 정태주의 움직임으로 다시 가까워졌다. 윤지우의 손에서 연고를 집어 든 정태주가 가볍게 뚜껑을 열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의 전개에 당황한 윤지우가 꼼짝없이 멈춰 서서 눈만 도르륵 굴렸다. 약지 손가락에 연고를 덜어낸 정태주가 손끝이 닿을 듯 말 듯 할 정도로 움직여 윤지우의 입가에 약을 발라주었다. 따끔한 느낌에 저도 모르게 인상을 쓴 윤지우가 눈치를 보며 시선을 마주하자 정태주는 슬쩍 웃기만 했다. 눈가에 난 상처에도, 볼 위에 난 생채기에도 연고를 바르는 정태주를 보며 윤지우가 작게 속삭였다.
" 선배, "
윤지우의 부름에 정태주는 하던 것을 마저 하며 어, 하고 짧게 대답했다. 제 상처를 살피느라 집중한 정태주의 얼굴을 보며 윤지우는 잠깐 망설이다가 이내 굳게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 초코우유, 나 주려고 샀어요? "
연고의 뚜껑을 닫고 밴드의 포장을 뜯던 정태주가 고개를 모로 돌리며 피식 웃었다. 윤지우가 답을 종용하며 끈질기게 정태주의 시선을 좇아 눈을 맞추었다. 정태주는 포장을 뜯은 밴드를 윤지우의 볼 위에 붙이며 일부러 상처 부위를 꾸욱 눌렀다. 윤지우는 반사적으로 눈을 찡그리며 아픈 신음을 냈다. 반짝 눈을 뜬 윤지우는 인상을 팍팍 쓰며 정태주를 노려봤다. 아파 죽겠는데 이게 지금 무슨 짓이야, 하는 게 말로 하지 않아도 다 보일 정도였다.
" 알면서 왜 물어. 모르면 바보 아닌가. ... 간다. "
언젠가 윤지우가 했던 그 말을 다시 돌려준 정태주는 미련 없이 발걸음을 돌려 운동장 쪽으로 향했다. 아마도 왜 이렇게 오래 걸렸냐는 추궁을 받겠지만 그런 것쯤은 상관없었다. 남겨진 윤지우는 홧홧하게 달아오른 목덜미를 차가운 손으로 문지르며 괜히 손부채질을 했다. 선수다, 선수야. 진짜 장난 아니다. 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멍하니 서 있던 윤지우는 목적지를 설정하지도 않고 일단 발을 움직였다. 심장이 너무 크게 쿵쾅거리고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몸을 움직여야만 했다.
부산스럽게 걸음을 옮긴 윤지우는 습관처럼 다시 교실로 향했다. 비록 양호실을 다녀오진 못했지만 얼굴에 밴드를 붙이긴 했으니 의심을 사진 않았다. 제 자리에 슬그머니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윤지우는 내내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창밖만 바라보았다. 수업에 집중이 될 리가 없었다. 방금 전 있었던 간지러운 사건을 곱씹으며 자꾸만 솟아오르려는 입꼬리를 단속했다. 내일 아침엔 정태주 몫으로 사탕이라도 하나 사야겠다, 하는 생각을 하며 윤지우는 결국 슬그머니 미소 지었다.
석식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아이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급식실로 뛰기 시작했다. 그 사이를 유유히 걸으며 주머니에 손을 넣었던 정태주가 솟아오르려는 입꼬리를 단속했다. 아까 윤지우에게 붙여준 밴드의 껍데기가 주머니 안에서 굴러다니고 있었다. 손끝에 닿는 것의 감각을 느끼며 느릿느릿 걸음을 옮긴 정태주는 식판을 받아들고 자리에 앉으면서도 내내 간지러웠던 아까의 사건을 곱씹었다. 내일 아침엔 약국에 들러 새 밴드를 하나 사둬야겠다, 하는 생각을 하며 정태주는 결국 슬그머니 미소 지었다.
아직 오늘이 다 끝나기도 전인데, 두 사람은 벌써부터 제게 올 아침을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