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순이(rattebui)
사랑에는 4가지 종류가 있다고 했다.
과연 내가 하는 사랑도 그 범주 안에 들어갈까, 그게 아니라면 내가 가진 이 감정은 어떤 말로 정의해야 할까.
머릿속이 어지럽지만 많은 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옆에서 널 지켜주는 것 외에는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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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훈이 형님을 모셨을 때 느꼈던 감정은 동경이었다. 썩어빠지고 어두컴컴한 이 조직에서도 형님은 작은 빛을 잃지 않으셨다. 별을 품고 있는 사람처럼 어딘가 환하고 밝았다. 그 모습이 신기했고 부러웠다. 조직의 일을 수행하면서 사람을 몇십 명씩 죽이고 때려도 얼룩지지 않아서. 형님은 품고 있는 별 덕분에 끝까지 평범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비정상적이고 평범하지 않은 조직에서 평범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엄청난 무기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에.
끝까지 평범하다는 것은 언제든 어떤 대가를 치르든 간에 조직을 벗어나서 살아갈 수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에 태생부터 이런 곳에서 길러지고 자라온 나는 절대 가질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태생부터 길바닥 출신, 조직에서 길러진 자식 이 문장들이 전부 나를 향했다. 어렸을 적부터 조직의 손에서 길러져 학교에서 배우는 수학보다 칼 잡는 방법부터 배웠고, 상대가 나를 공격하려 했을 때 어떻게 하면 가장 빠르게 적을 처리 할 수 있는지를 먼저 배웠다. 10대 학생이 할 수 있는 평범한 생활이라는 것은 꿈에서만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최무진과 윤동훈이 만나 조직을 일으킬 때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형님은 꽁꽁 감춰둔 빛을 보러 갈 때면 조직의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도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회장님도 형님의 빛을 궁금해했었고, 나도 궁금했었다. 그 빛을 알게 된다면, 나도 보게 된다면, 나도 평범해질 수 있을 것 같아서.
너를 만나기 전까지 삼계탕집에 자주 찾아가는 것도 그 이유였다.
이렇게 많은 조직원이 드나듦에도 여전히 따스하고 같은 향과 분위기를 풍기는 게 신기해서, 그런데도 적당히 특별하고 적당히 평범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어서. 적당한 무관심이 오히려 편안하게 만들어서. 어디 출신인지, 왜 이렇게 다치고 온 건지 묻지도 않고 그저 날이 춥다고만 이야기하는 이 집의 분위기가 어딘가 편해서. 그래서 다른 집보다 그 집에 자주 갔었다.
너를 만나고는 다신 그 집에 가지 않았다.
내가 찾던 따스한 빛이 내 앞에 있어서.
빛은 어둠 속에 있으면 돋보일 수밖에 없다. 밤하늘의 어둠이 기억되는 것보다 별을 기억하는 사람이 더 많은 것처럼. 이런 곳에 있으면 따스한 빛을 가진 사람은 끝을 볼 수 밖에 없다. 남들보다 더 빨리.
형님은 빛을 지키려다 끝을 맞이했다. 그런데 그 별이 어둠 속으로 혼자 들어왔다.
아버지가 죽었다며 눈에 독기가 가득한 채로 찾아온 너는 이를 아득바득 갈며 이 더럽고 추잡한 세상에 뛰어들었다. 보는 내내 안타까워서, 말린다고 말려질 것 같지도 않아서. 할 수 있는 건 적당한 무관심으로 보호해주는 것밖에 몰라서 계속 지켜보기만 했다. 평생 운동만 하고 싸움만 하던 남자들도 버티게 힘들어하던 훈련도 새벽에 일어나서 밤늦게까지 혼자 해내는 모습을 보며 이런 면은 형님을 닮았네 하다가도 혼자 구석에서 아무도 알지 못할 깊은 생각에 빠져있는 모습을 보면 이런 면은 형님을 안 닮았네하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훈련장에서 혼자 연습하다가 힘들어했던 기술이 성공해서 작게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 왠지 모르게 나도 웃음이 새어 나왔다.
형님은 왜 너를 그렇게 감추고 보호했을까.
아마 저 웃음 때문이겠지.
언제쯤인지는 모르지만, 언제부턴가 너를 보면 어둠에 빛이 먹히지는 않을까 없어지지는 않을까 걱정하곤 했다. 그러다 보니 내 시선의 끝엔 항상 네가 있었다.
누구는 이러는 행동과 감정이 사랑이라고 하더라.
동경도 사랑일까? 내가 가진 건 평범함에 대한 동경일까 아니면 사랑하는 걸까.
아직 답을 내리지는 못했다.
사랑한다고 하기엔 더러운 조직 태생이 사랑한다고 하면 네가 너무 아까워서,
동경한다고 하기엔 네 생각만 하면 가슴이 답답해져서,
그 둘 중 아무것도 아닌 거로 정의 내리기엔 자꾸 신경 쓰여서.
처음 느끼는 이 감정이 사랑인지 확실하지도 않은 데다,
만약 이 감정이 정말 사랑이라면, 아버지의 복수를 하겠다며 악착같이 살아온 너한테 아버지를 죽인 원수의 부하가 너를 사랑한다고 하는 건 너무 이기적이니까.
수백만 가지 이유와 핑계를 대면서 내린 결론은 내가 너를 지켜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빛을 끌어안고 별을 바라보면서 다른 사람보다 더 빨리 끝을 맞이하더라도 그래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후로 임무에 나가거나 조직의 일에 연관되어서 네가 다쳐오면 그렇게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일부러 다른 애들을 시키기도 하고 주변에서 말려도 내가 처리해왔다. 내 몸이 망가져도 괜찮았다. 너만 괜찮을 수 있으면 팔 하나가 망가져도 행여 내가 걷지를 못하게 된다고 해도 괜찮았다. 그동안에는 잠깐이나마 형님이 된 것처럼 품 안에 별이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너를 보면 그 모든 수고와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을 느꼈다. 잠깐은 나도 형님처럼 평범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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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은 평생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다. 출신이 더러운 만큼 길바닥 출신들답게 영역 싸움과 자리싸움은 매일같이 치열하니까. 조직이 성공해서 왕좌에 올랐다면 당연히 망하는 길로 접어들어 가고 있다는 것이기도 하니까. 여느 조직과 다를 바 없이 우리도 끝을 향해 가고 있다. 지키고 싶은 게 있다면 목숨을 걸어서라도 지켜야 한다고 배웠다. 그게 이 바닥의 사람들이 가진 신념이다. 알고 있다. 이미 조직은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흔들리고 있다. 여기서 더 해봤자 조직에 도움 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걸 잘 알차만, 그래도 나는 너 하나만이라도 지켜내야 하기에.
세상이 푸르게 보일 정도로 추운 겨울날이었다. 익숙한 검은색 차에서 검은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 쏟아져나왔다. 칼을 든 사람, 둔기를 든 사람, 하나도 빠짐없이 손에 흉기가 들려있었다. 우리 쪽 차에서도 검은색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쏟아져나왔다. 꼴에 호텔 껍데기를 쓰고 있다고 끝까지 양복을 차려입은 모습이 볼만했다. 차에 앉아서 가만히 지켜보다 뒷자리에서 태주야 나가자. 하는 소리와 함께 차에서 내렸다. 글쎄 그다음은 지극히도 평범하게 조직 간의 힘겨루기가 시작됐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맞고 때리다가, 저 멀리서 흐릿하게 너처럼 보이는 형상이 보였다. 단발머리 여자가 주위를 서성이고 있었다. 순간 맞고 찔려서 아픈 상처들보다 가슴이 욱신거렸다.
지우가 여기를 알 리 없을 텐데. 순간 등줄기에 땀이 흘렀다. 그 모습을 보자 겁이 났다. 일부러 회장님한테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너를 부르지 않았고, 상대 쪽이 너를 데리고 협박할까 꼭꼭 숨기고 살았는데, 어떻게 해서든 너를 지키려고 했었는데.
네가 어떻게 여길,
그 순간이었다. 뒤에서 회장님이 태주야! 하고 소리치는 게 들렸고 곧이어 날카로운 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따뜻한 게 흐르는 걸 느낌과 동시에 나는 땅에 쓰러졌고 하늘은 파랬다. 널 처음 볼 때도 하늘이 참 파란 날이었는데. 하늘이 유난히도 파란 날에 너를 만나도 유난히도 파란 날 너를 떠나는구나.
한번은 이런 생각도 했었다. 만약 내가 너를 지켜내고, 조직에서 멀어지고, 나 자신도 지켜냈다면. 언젠가 네가 말한 대로 조용한 곳에 가서 수영이나 종일 하면서 둘이서 사는 건 어떨까 생각도 했었다. 그곳에서 너의 웃음을 한없이 보면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저 하늘에 있는 별이 너를 닮았다고 이야기하고 그곳에서도 내가 너를 지키고 끝까지 내가 너의 우주가 되는 건 어떨까 상상했었다.
상상 속에서는 조금 이기적이어도 되니까. 이뤄지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네가 원하는 것이기에 나름대로 준비를 해보기도 했었다.
그런데도 끝까지 염치없이 살아서 너의 우주가 되는 건 결국 못했나 보다. 미안하다.
차마 별을 품에 안고 살아가기엔 너의 우주가 되기엔 내가 너무 미천해서 보잘것없어서, 내 능력이 거기까지라서 그런 것 같다. 다음 생에서는 절대 엮이지 말자.
밤하늘의 어둠은 내가 맡을 테니 그중 가장 빛나는 별은 지우였으면 좋겠다.